본문 바로가기

예전 글/일기(2013~)

2013.2.8

설거지


     집에 돌아와 부엌을 보니 이상하다. 분명 어제 저녁에 설거지를 했는데 또 그릇이 쌓여있다. 하루 종일 밖에 있던 내가 범인일리는 없다. 그러니 저 설거지는 내 몫이 아니라 여기고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설거지도 내가 했다. 밖에 나갔던 언니에게 군것질 심부름을 시킨 탓이다.

     하루만에 설거지가 쌓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제 그릇을 다 씻어놓고 그릇을 가져다 놓다보니, 마지막으로 헹군다고 밥그릇을 쌓아놓고는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설거지 양이 너무 많아서 다른 그릇을 정리하다 밥그릇 탑의 존재를 잊었다.  내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간 사이, 내 밥그릇 탑은 하루도 가지 못하고 언니 손에 대야로 무너졌다. 다행히 오늘 설거지는 무너진 밥그릇 탑을 합쳐도 어제 설거지보다 양이 적었다. 내일 설거지 양은 오늘보다는 또 적을 것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어제 오늘 두 번 하게 되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래도 어쩌겠냐 싶어 수세미에 세제를 묻힌다. 며칠 전에 산 분홍색 수세미다. 항상 쓰던 녹색 수세미보다 예쁘고 특이하게 생겼길래 사왔건만 거품이 잘 나지 않는다. 언니는 '초보 주부의 실수'라고 말했다. 이 실수 탓에 요즘에는 예전보다 세제를 더 많이 쓴다. 

     단번에 설거지를 끝낼 수는 없다. 그릇 하나 하나를 마주하고 수세미로 여러바퀴 닦아주어야 한다. 오늘 아침 그릇이며, 언니 점심 그릇 하나하나 닦다 보니 손에 든 그릇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먹으면서는 어떤 기분이었는지가 새삼 떠올랐다. 오늘 치 설거지에 내가 쓴 그릇은 오늘 아침 밥그릇밖에 없었지만, 그 밥그릇 하나 닦는 짧은 시간동안에는 갈치 조림 하나 놓고 혼자 먹은 오늘 아침이 떠올랐다. 

     며칠 전, 고향에 혼자 내려간 언니는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갈치조림을 들고 왔다. 시간이 지나며 갈치조림은 갈치 젓갈 모양새를 띄어가지만, 아직까지는 데워먹으면 밥 한그릇은 챙길 수 있다. 다 먹은 밥그릇을 글로 묘사하기는 더러우니 씻는 과정은 생략하겠다.

 

     때때로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 말고, 누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성찰적으로 하루하루 과거를 떠올리냐 물으면 얼마나 그렇다고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다들 앞만 보고 살아가는 세상에, 같은 것을 두 번 하기는 괴롭고 귀찮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두 번 읽기는 싫어하는 나다. 그런 내가 하루치 일기거리도 안 될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니 신기해서 써 보았다.




묘사


     평소 내가 블로그에 쓰는 일기에 얼마나 구체적인 과거 이야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날의 일과를 기계적으로 되뇌기보다는 당장 키보드 앞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쓰는데 손을 쏟으니 말이다.


     소설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일기를 쓰다보니 전과는 다른 글을 쓰고 싶어 '설거지'를 골랐는데, 설거지에 대한 글 한편도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그 느낌 하나하나를 불러세우기가 어려웠다. 그러고보니 나는 생생한 묘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오늘은 해가 지고 사회대와 운동장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며칠 사이 내린 폭설 탓에 두툼한 눈 속에서 헤맸다. 어제 내려 위에 얇은 얼음이 서린 굳은 눈을 밟으며, 이 눈을 밟는 느낌을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안 되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역시 안 된다. 밤새 내린 눈과 하루 지난 눈, 얇은 눈과 두툼한 눈, 사람들이 많이 밟은 눈과 내가 처음 밟는 눈 모두 밟는 느낌이 다르건만, 내게는 이를 표현할 깜냥이 없다. 소설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예전 글 > 일기(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2.24  (0) 2013.02.24
2013.2.22  (0) 2013.02.22
2013.2.16. 토플 시험  (0) 2013.02.16
2013.2.9  (0) 2013.02.11
2013.2.7  (0) 201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