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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일기(2013~)

2013.4.10

  파산. 카드에 들어있는 돈 400원은 꺼내 쓸 수조차 없다. 학교의 쥐를 돌본지 한 달 넘게 지났는데 왜 들어올 돈이 안 들어올까. 모레면 과외가 여덟 번을 채우니 과외비가 생기면 요즘처럼 밥을 굶지는 않을테다. 한 달 후에는 두 달에 한 번 들어오는 튜터링 비가 들어올테고. 그럼 조금 살만하려나. 



1. 아바투르는 죄가 없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자체로도 의미있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영어 실력이 여실히 들어나기 때문이다. 영문판 아바투르는 단문이어도 말은 알아듣게 하더만, 아바투르의 말투에 웃던 내가 아바투르만도 못하게 말을 한다. 쓰는 단어도 지극히 정해져 있다. different, similar, difficult, add.... 난 분명히 두번 본 수능 둘 다 1등급이었는데, 내가 배운 문법은 어디에 있나! Did you understanded라고 묻고 Your father is serious people 이라 말한다. 내 영어 실력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망'인지 몰랐다. 오죽하면 초급 한국어를 하는 튜티의 한국어 실력이 10년 넘게 영어와 싸운 내 영어실력보다 더 나은 것 같다. 나, 내년에 교환학생 가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2. 내가 쥐는 이 쥐가 생명은 생명인가.


  한 달이 지났는데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이 일, 실험동물 관리. 어찌되었든 아주 조금은 내 전공과도 관련된 일이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쥐가 21일만에 출산하고 다시 21일만에 성숙해진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중이고, 이제는 쥐의 암수를 구별할 줄 안다. 쥐의 귀여움을 깨달아 언젠가 래트를 키워보겠다 꿈꾸는 동시에, 가끔 손 안의 쥐가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모니터링 쥐 부부의 새끼 출산도 어느새 2주가 지났다. 눈도 못 뜨던 애들이 이제는 정신없이 빨빨거린다. 아직 꼬리 길이가 내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도 못하지만 털도 나고 눈도 초롱초롱한게 쥐 모양을 갖췄다. 밥도 얼마나 잘 갉아먹는지 케이지에 넣어준 사료도 물도 금방금방 떨어진다.

  새끼 쥐 총 여섯 마리. 엄마쥐 아빠쥐까지 합치면 여덟 마리. 도저히 한 케이지 안에 있을 수 없는 서구(鼠口)다. 게다가 부모 쥐의 원대한 자식 계획이 아직 성에 차지 않았거나, 천륜을 저버리는 근친상간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아르바이트생 권한(?)에 케이지를 하나 더 놓아서 암수를 갈라놓기로 몰래 계획했다.

  케이지를 열어 누가 암컷이고 누가 수컷인지를 보는데, 새끼 쥐 한 마리가 내 손에서 빠져나왔다. 헐. 그 작은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클린벤치 아래로 도망갔다. 빗자루로 뒤져도 흔적도 없다. 나는 망했다. 주변의 먼지야 다 사료쪼가리니 굶어 죽을리도 없다. 실험동물실 어딘가 쥐 한마리. 괴담감이다. 며칠 전 하드렌즈가 하수구에 빠질 때보다 더 멘붕에 빠졌다.

  한참 찾다가 문 아래에 새끼 쥐 한마리 지나갈 공간을 보고 경악하고, 얼른 받침대로 가렸다. 감염실 안에만 있으면 기회는 있다고, 그렇게 자위하며 일단 다른 쥐의 케이지를 갈아주었다. 마음이 진정된 후에는 밀걸레를 가져와 봉으로 바닥을 뒤졌다. 있었다! 그 작은 몸 안에 ATP가 있으면 얼마나 있고 근육세포가 대사하면 얼마나 대사한다고 정말 빠르게 도망가더라. 그래도 뇌세포는 덜 자랐나, 내 손안에 다시 들어왔다. 하수구를 뒤져서 렌즈를 찾았을 때보다 더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모니터링용 쥐는 물론 실험에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깥에 노출되어버린 애를 다른 쥐와 섞어서 키워도 될까? 사실 새끼 쥐 여섯 마리도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녀석들이다. 이주 전 직원분께 모니터링용 쥐가 새끼를 낳았다고 말씀드렸더니 '걔네들 처리해야 된다' 고 하셨으니까. 실험실 상황을 점검할 쥐야 다 큰 쥐 두 마리도 충분하다. 

  쥐의 꼬리를 잡고 있으니 공중에서 계속 버둥거렸다. 꼬리를 잡은 채 바닥에 놓았더니 어떻게든 도망가겠다고 기를 쓴다. 휴지를 바닥에 놓으니 지우개똥만한 팔이 휴지마저 치워낸다. 놓아주지 않았다. 새끼 쥐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 목을 잡고, 꼬리를 당기면 쥐는 죽는다. 가장 고통이 덜한 안락사 방법이란다.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다.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어쩌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을텐데) 실험실에 있는 70% 에탄올을 거의 적시듯 뿌렸다. 그리고 아빠네 케이지로 옮겼다. 쥐도 기억력은 있는지 자기 아들내미는 알아보고 어떻게 잘 대하는 것 같았다.

  쥐는 인간보다도 훨씬 후각이 발달했는데, 게다가 태어난지도 얼마 안 되어 피부도 약했을텐데 얼마나 자극적이었을까. 다음날이면 죽을줄 알았는데 다행히 잘 빨빨거리고 있었다. 다행인가, 잘 모르겠다.

  감염실의 케이지가 열 개 넘게 한번에 사라졌다. 케이지 하나 당 세 마리 내지 다섯 마리는 들어가니 몇 마리가 한 번에 희생되었는지 모르겠다. 갈아야 할 케이지가 없어져서 편하다 생각이 먼저 나왔다. 인간이 키우는 거의 모든 동물은 원래부터 자원이다. 윤리를 생각하면서 생명을 다루기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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