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멍청한 작가라도 자신의 설정을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문제는 작가가 작품의 내,외적 요소에 대해 강요하지 않고 잠깐 언급만 하더라도 독자들은 그것이 모범 답안인양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프로 작가들은 절대로 자신이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그 아래의 설정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영도 작가의 팬들은 올해에도 과수원이 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지만 나는 영원히 프로 작가는 못 될테고, '버바네 휴게소'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 나의 후기도 중요하기에 구태여 이렇게 글을 남긴다. 버바네 휴게소에 대한 후기가 아니라, 버바네 휴게소를 그렸다는 행위에 대한 후기이니 주의.
1. 발단
'버바네 휴게소'는 '그림을 그릴 구실이 생기면 그림 실력이 늘겠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림은 잘 그리고 싶은데 스투 자유의 날개로 만화를 그릴 소재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딱히 다른 작품에 대한 덕질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xp에 올렸던 케리건 그림이 화근이었다. 진지하게, 열심히 그렸는데 정말, 못 그렸다. 댓글에서 여자 그리는 연습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주인공이 여자애인 만화를 그리면 여자 얼굴은 질리도록 그리리라 생각했다.
예상은 맞았다. 정말 많이 그렸다. 그렇다고 여자를 잘 그리게 되지는 않더라. 물론 5년 동안 아무 그림도 안 그린 것보다야 늘었다.
이니는 정말 '그리기 쉽게' 설정했다. 머리를 못 그린다>팬티위생두건을 씌운다. 목을 못그린다>스카프를 묶어준다. 상하체를 못그린다> 앞치마를 입힌다. 손을 못그린다>장갑을 씌운다. 그러다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하나씩 벗겼다. 표현이 이상한데, 어쨌든 그랬다. 그래서 마지막화에는 위생수건도 스카프도 앞치마도 장갑도 없다.
토리는 가장 대충 그렸던 캐릭터다. 이름도 나중에 지었으니까. 평범한 프로토스여야 했으니 광전사로, 하지만 갑옷은 그리기 힘드니 대신 면옷을 입혔다. 옷에 주름이 생기면 귀찮으니 두꺼운 조끼와 가죽바지로 골랐다. 그려놓고 보니 야매 히피 의상이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설정한 덕분에 토리는 그릴 때마다 부담이 없었다.
다음에는 저그 대표 캐릭터가 있어야 하니 무치를 그렸다. 맹독충 생존기의 맹덕이를 참고했다. xp연재할 때는 이상하게 무치가 제일 인기가 많았다. 독자들보다도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버트&설은 버바네 휴게소에서 생각한 캐릭터는 아니고, 다른 이야기에 있던 애들인데 어차피 설정놀음에서 끝날 애들이니 그냥 데려왔다. '괘씸한 레이너 특공대가 마 사라에 저그 소굴을 그대로 두고 떠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에서 시작해서 플롯을 구상했는데... 버바네 휴게소 후속작을 그릴망정 얘네 이야기는 영원히 안 그릴 것 같다.
버바 씨는 자유의날개 캠페인 동영상 버바네 휴게소를 참고해서 그렸다.
2. 전개
5년 동안 휴재도 길었고 구상도 많이 바뀌었지만, 주제만큼은 바꾸지 않았다. '확률은 낮지만 여파는 엄청난 미래의 위험을 막기 위해 현재를 희생해도 좋을까?' 쉽게 얘기하면, 미래의 남자/여자친구가 일베/메갈을 할지도 모르는데 소개팅이란 걸 나가야 하나?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이니는 대체로 세상에 무해하나, + 미래의 이니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를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이니는 저그 농장을 차리고, 휴게소 손님들에게 단체로 '춤'을 시킬 수는 있지만, 장난으로라도 라바 한 마리 죽이지 않을 아이다. 착하다는 말이 아니라 합리적이라는 이야기다.
토리는 광전사 주제에 종족의 화합과 우주 평화를 꿈꾼다. 프로토스라서 순수하다. 이니와 함께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길 꿈꾼다. 프로토스라서 오만하다. 테란이라면 소스라칠 '미래의 위험' 따위는 자신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약속한다.
무치는 종족의 정체성이 사라진 저그다. 애초에 저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생각을 하는 종족이 아니다. 그렇지만 차 행성이 아니라 휴게소에서 태어난 이상 무치는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심지어 이니한테 역할과 이름까지 받았다. 군단의 바퀴와 휴게소의 운반 가능 의자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버바 씨의 과거는 이 주제와는 관련없는 이야기이기에 넣을지 말지 고민했던 이야기이다. (언젠가 그릴지도 모를) 후속작에 필요할 성싶어 넣었다. 버바 씨가 어떻게 유령을 기르고 이니 엄마(?)를 만나는지에 대한 플롯은 이미 머리속에 다 짜두었는데, 이걸 이니의 현재에 어떻게 녹일지는 아직 구상하지 못했다.
3. 위기
꽤 신경을 쓴다고 썼던 부분이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한참 그리다가 xp 댓글창의 어느 코난에게 전개를 들키는 바람에 필요 이상으로 질질 끌었다. 연재가 한 번 끊긴 이유는 그 탓이 컸다. 이야기가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니 그리기가 싫어졌다.
몇년 후에 다시 그리기 시작해서, 어찌되었든 전투를 시작했다. 뿌려놓았던 떡밥을 점차 회수하며 이야기를 진행했다. 토리의 액션이 광전사의 박진감넘치는 그것이 아니었던 이유는, 단순히 내가 액션신을 못 그리기 때문이다.
토리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소박한' 설정이 추가되었다. 지점토로 토리를 만들다가 떨어뜨려 개발살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느 떡밥이 그렇듯, '토리의 고소공포증'으로도 꽤 진지한 이야기를 만들어볼 법하다. 프로토스 중에서도 특히나 광전사는 두려움을 모르는 족속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 불쌍한 광전사는 고소공포증이 생겼을까? 대략의 줄거리는 역시 머리 속에서 짜두었지만, 칼라와 심리묘사가 많아 만화로는 표현하기 힘들 것 같다.
4. 절정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하고 처리할지 여러 갈래로 생각했었다.
1) 토리가 대머리 아저씨+유령들을 무찌른다. 휴게소가 박살난 탓에 이니와 버바 씨는 거처를 옮겨야 한다. 지하차고의 저그를 두고 버바네 가족과 토리는 쿨하게 헤어진다.
2) 토리가 대머리 아저씨를 무찌르다 죽는다. 용기병이 된다.
3) 토리가 대머리 아저씨를 무찌르기 전에 버바 씨가 자진해서 그들에게 잡혀간다. 이니와 토리는 유령 프로젝트의 추적을 따돌리는 동시에 버바 씨를 구하러 가야 한다.
4) 지금의 결말
1)은 제일 깔끔하다. 닫힌 결말로 끝난다. 하지만 이 경우 이니의 사이오닉 능력이 찝찝한 떡밥으로 남는다. 맥거핀이라 우겨볼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처음에 잡았던 주제, '확률이 낮음에도 기대값은 큰, 미래의 위험을 막기 위한 현재의 희생'과 어긋난다. 오늘은 토리가 이니를 구했지만 그 다음번에는? 유령 사관학교에 제대로 잡힌다면? 저그에게 감염된다면? 칼날 여왕은 못 되어도 면도날 여왕이 될지도 모르는데?
2)는 공허의 유산이 나오고 연재를 시작했다면 충분히 고려했을 진행이다.
3)도 마찬가지로 이니의 사이오닉 능력이 맥거핀이 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속편을 전개해야만 하는 결말이 되기에, 이니의 사이오닉 능력은 언제든 다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염두에 두던 결말이었으나 주제의식이 살지 못해서 폐기했다.
결국 4)까지 갔다(당장 떠오르지 않지만 다른 결말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던듯 싶다). 지금 결말을 고른 이유는
'이니의 사이오닉 능력, '미래의 위험성'을 정면으로 표현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토리의 오만함이 깨지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주제와도 얼추 맞는다.
+ 무치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꽤 고민했다. 무치가 생존했다면 전투 직전까지 '군단에 남아 정수를 흡수하고 싶던' 무치는 절대 이니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결말에서 무치가 이니를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치 성격을 좀 죽일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무치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니었나?
무치는 이니 아래서 태어나 이니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결국 '저그로서, 이니를 지키겠다'는 선택을 내리지만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충격탄을 맞는다. 불쌍한 무치. 결정에 후회는 없을테니 죽으면서는 행복했으리라. 그러나 최종에는 그 이니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5. 결말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참견할 바 아니지만 나로서는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니고 그저그런 열린 결말이다.
이니는 아버지가 죽은지도, 자신이 죽은 무치를 자신의 기억만으로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르고, 토리는 둘 중 어느 것도 이니에게 말하지 못한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덕분에 둘은 가까워질수도 멀어질수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3년이 지났다 가정하면, 공허의 유산 시점에서 이니는 토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성격에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여고생이 총각 선생님 좋아하는 분위기로?). 토리는 비밀을 어물쩡 물고 늘어진 죄책감과, 그럼에도 언젠가는 말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차마 떠나지 못하면서도 그 눈치 없는 성격과 프로토스식 위선에 이니의 마음도 자기 마음도 모르겠지.
속편을 그린다면 반드시 터져야 하는 방아쇠지만, 무엇보다 내가 속편을 그릴지 모르겠다. 그림+시나리오 공부 좀 하고 돌아오고 싶은데, 그럼 전편을 기억하는 독자가 사라질 것이다.
완결도 중요하지만, 만화를 완결함으로써 풀어낸 떡밥을 전부 회수했다는데 더 뿌듯하다. 던지고 풀어내는 떡밥도 있었지만, 그릴 때는 생각도 하지 않다가 전에 그렸던 내용을 다시 써먹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이게 창작의 재미인가보다. 으으으.. 빠져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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