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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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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스포 없이 영업하기 테드 창의 소설집 에는 무동무언증이 나온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깨달은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말하기를 그만두는 병이다. 시리즈를 읽은 독자는 잠시 무동무언증에 빠진다. 작품이 뛰어나 말을 잇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가 인류의 운명을 눈 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문명은 이다. Remembrance of Earth's Past Trilogy 는 인류와 우주 간의 이야기이다. 시간 배경은 서기를 넘고 공간 배경은 우주를 채운다. 이렇게 커다란 무대에 이야기를 꽉 채우는 작품은 적다. 몇 권 안 되는 소설에 긴 세월을 견디는 인물들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 시대를 지나며 발전할 사회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울할 때 보면 좋은 한국어판 이전 표지 불로장생하는 주인공이 나온 작품은 많았..
뮤지컬 TboM 후기 하나에 빠지면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일랜드에서 짰던 이야기가 계속 꼬리를 잇는다. 지금 겪는 여행에 최대한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머릿속에서 콩밭에 간다. 자기 전이면 상관없지만 길을 걸으면서도 이러면 주변의 풍경에 집중하지 못한다. 앞으로 다시는 겪지 못할 경험인데 언제나 하던 생각을 똑같이 하며 시간을 보내기가 아깝다. 이런 상태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될까 겁이 난다. 지금보다 훨씬 바쁘고 열정적이여야 할 일상에 복귀한 후에도 이러면 답이 없을텐데. 생각의 깊이가 얕아졌다. 언제 생각을 깊이 했었냐 물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모국어와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 입 밖에 나오는 말은 정말 가벼웠고,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도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여행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도 일상에서 하..
5월 26일, 런던 노트북이 이상하다. 오늘도 부팅이 안 되는 놈을 부팅 USB로 간신히 얼러서 켰다. 세상이 좋아 스마트폰으로 뭐든 되는 시대이지만,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내 노트북이 정말 고철덩어리가 되지는 않을까 불안하다. 오늘 낮에는 꼭 여행기를 써야겠다 다짐했으니, 이 늦은 밤 노트북을 달래가며 기록을 하자. 1. 몇 년 간 케백이로 쌓은 초라한 내공 덕에 나는 친구의 꽤 괜찮은 찍사가 되었다.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친구는 평생 보기 힘든 배경의 훌륭한 모델이다. 친구의 캐논 이오스를 찍다보면 내 케백이가 얼마나 색이 거친지(내가 맞춘 설정이다) 보였다. 캐논 DSLR은 그 바디처럼 둥글둥글한 색감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았다. 바로바로 맞춰지는 초점이며,(케백이와 16-45 콤비는 트롬소를 갔다온 이후 AF기능..
5월 20일, 채스워스 하우스 버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는데, 호스텔에 돌아오고 노트북이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부터 말썽이었던 노트북은 갖고다니기 미안할 정도로 상태가 별로다. 도미토리 방 바깥에서 종이를 깔고 앉아 아무 생각이나 쓰고있으니 오늘 머리속에 들었던 생각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진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싫어하니, 글이라도 남겨야 비싼 여행값을 할텐데 말이다.. 더블린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장소는 맨체스터다. 축구 말고는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던 도시고, 도착해서도 관람차 말고는 눈에 띄는 건물도 없다. 산업시대 소매치기가 떠오르는 벽돌 거리와, 바로 옆에 천연덕스럽게 있는 현대적인 고층 빌딩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무언가를 보러 온 곳도 아니다. 친구가 보고싶어했던..
Natural history museum & night scenes, London 사진 정리가 한참 밀렸다.언젠가 보겠냐마는 그래도 정리. 자연사박물관을 찾으러 대영박물관에 간 탓에(...) 러셀스퀘어에서 옥스포드 서커스쪽을 지나 하이드파크를 향했다. 걸어가며 둘러보는 런던은 정말 생각했던 런던의 인상이었다. 유럽 도시는 걸어서 보는 맛이 있다. 옥스포드 거리와 하이드파크를 지나 생각보다 오래 걸어서 도착한 자연사 박물관.그리스 신전 짝퉁스런 대영 박물관이나 국립 미술관 건물보다 훨씬 위엄있었다. 자연사 박물관 하면 떠오르는 공룡 모형. 자연사 박물관 찬양을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도킨스였나 빌 브라이슨이었나 아니면 둘 다였나.배경지식은 중요하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몇 구절에 국립미술관과 대영박물관을 제치고 런던 자연사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전시품 촬영은 버스 안..
Voss & Flåm & Myrdal, Norway 피오르드를 보러 베르겐까지 왔다.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고 기차를 타러 나섰다. 베르겐 역. 중앙이 뚤린 천장에서 모네의 생 라자르 역 그림이 떠올랐다. 국제학생증을 보여주고 표를 끊었다.비수기라 칸에 사람들이 없었다. 베르겐을 빠져나갈 때는 졸면서 가다가, 슬슬 멋진 절경들이 보이자 자리를 옮겨 다니며 구경했다. (떠올렸던 그 연작 그림 중 하나를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보았다. 세상에, 모네 그림을 직접 보게 되었다니) 열차가 보스 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를 구경하다가 바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려야 했다. 관광 사무소에 가서 물어보니'어차피 님은 지금 가도 페리 못탐ㅋ 구드방엔 비추, 바로 플롬으로 가셈'이라고 해서 깨끗이 마음을 비우고 작은 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베르겐만큼 화려하..
Bergen, Norway 계속 안 올리면 까먹을 것 같으니 사진이라도.베르겐은 송네피요르드를 보기 위한 첫 관문이지만, 마을 자체로도 아기자기하니 예쁜 곳이다.게다가 트롬소에서 그 눈보라를 맞다가 푸른 하늘을 보니, 어느 땅이라도 좋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베르겐. 여느 유럽답게 마을 중앙에 호수가 있다. 숙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공항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하니 표를 끊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라. 시내 버스 한 번에 9천원에 육박하는 곳이라 아저씨의 배려가 고마웠다. 목적지인 몬타나 호스텔은 케이블카가 있는 산 중턱에 있었는데, 뭣도 모르고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린 탓에 이리저리 등산하듯 산을 올랐다. 산에 콕콕 박혀있는 집들은 참 예뻤지만 사는 사람들은 참 힘들겠다 싶었다. 마치 관악구 봉천동을 보는 느낌..? 코믹 산..
Tromsø, Norway, 밤 여행은 소설이 아니라 항상 멋진 서사를 남기지는 않는다. 어떤 여행에서는 발단과 결말 사이에 아무 전개가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뜻하지 않은 순간에 끔찍한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운이 조금만 더 없었다면, 그리고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었다면, 트롬소 여행은 전자로만 기억에 남을 뻔 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올려다 본 하늘에는 구름뿐이었고, 해가 진다고 해서 구름까지 산 밑으로 지지도 않았다. 낮에는 트롬소 섬을 돌아다니다 숙소에 들어와 쉬었고, 밤에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섬에서 불빛이 미치치 않는 곳까지 나섰다. 첫날 밤의 목적지는 섬 남쪽의 해변가였다. 버스비도 아까워 걸어가는 길은 더럽게 길었다. 인도도 없는 길에 차를 피하기 위해 도로 가장자리에 더러운 눈이 쌓인 곳을 골라서 걸어갔다. 중간중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