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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아일랜드와 영국

뮤지컬 TboM 후기

  하나에 빠지면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일랜드에서 짰던 이야기가 계속 꼬리를 잇는다. 지금 겪는 여행에 최대한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머릿속에서 콩밭에 간다. 자기 전이면 상관없지만 길을 걸으면서도 이러면 주변의 풍경에 집중하지 못한다. 앞으로 다시는 겪지 못할 경험인데 언제나 하던 생각을 똑같이 하며 시간을 보내기가 아깝다. 이런 상태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될까 겁이 난다. 지금보다 훨씬 바쁘고 열정적이여야 할 일상에 복귀한 후에도 이러면 답이 없을텐데.


  생각의 깊이가 얕아졌다. 언제 생각을 깊이 했었냐 물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모국어와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 입 밖에 나오는 말은 정말 가벼웠고,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도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여행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도 일상에서 하던 잡념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불안해졌다. (어쩌면 2014년 생활이 나머지 20년 일상과 너무 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었다.). 내가 나에게 자신있었던 것 중 하나가 '나의 생각'이었고, 지금 나는 몇 년간 남들 앞에서 풀어놓을 경험을 쌓는 중인데, 대가에 비해 머리가 지어내는 생각이 이렇게 초라하니, 돈을 펑펑 쓰며 다니는 여행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귀국일이 정해진 일정이다. 여행의 가치를 높이려면 생각을 더 깊이 하면 된다. 생각을 진행하는데 대화와 글쓰기만한 수단도 없다.





  The book of Mormon이라고, 2층버스 석 대당 한 대씩은 광고가 들어가는 요새 런던에서 제일 잘 나가는 뮤지컬이 있었다. (전) 뮤지컬 덕후였던 친구는 기어코 이 뮤지컬은 보고가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가난한 학생 여행객으로는 볼 방법이 없었다. 웨스트엔드의 자선사업(?)인 데이싯(아침에 극장을 열며 선착순으로 당일 공연 맨 앞 자리를 싸게 판다)도 없었다. 대신에 데일리 로터리라고, 공연 시작 두 시간쯤 전에 추첨을 해서 앞자리를 나눠준다는 정보를 얻었다. 추첨 시간에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로터리에 참여하는 자체가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성싶었다.

  추첨용지에 주소를 적어서 넣었는데 (당연히) 안 됐다. 나는 무덤덤했는데 친구는 꽤 아쉬웠는지, 자신만의 확률 법칙까지 세우며 다음날을 기약했다. 다음날 낮 공연에도 추첨을 하러 갔다. 대영박물관에서 탄 버스가 밀려서 추첨 바퀴가 닫히기 직전에 도착했다. 추첨을 하는 아저씨는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바스타드니 해피 루저니 하며 유쾌하게 추첨을 진행했다.

  마지막 세 표 중 두 표를 가저가는 추첨 용지를 읽으며 아저씨는 내 아일랜드 기숙사 이름을 외쳤다(늦게 온 바람에 정신이 없어 '더블린'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마지막에 추첨지를 넣는 사람이 당첨된다'던 친구의 엉뚱한 확률 규칙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Franz Ferdinand의 'Do you want to'에서, 'You so lucky!' 구절만 흥얼거렸다. 이곳이 아니면 영원히 못 볼 뮤지컬을 맨 앞자리에서 20파운드를 주고 보았다.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뮤지컬이고 내용 상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흥겨운 노래에 F**k이 넘치고, 배우들은 관객석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날리는 게 요즘 뮤지컬 추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내 취향에는 맞았다. 주인공 하나는 허우대만 멀쩡한 바보고, 다른 하나는 구라치기 좋아하는 덕후다. 주인공들이 모르몬교이다보니 영국에서 하는 뮤지컬이지만 미국 발음으로 진행되었다. 노래를 한 번도 듣지 않았는데도 꽤 이해할만했다. 맘마미아와 위키드보다 훨씬 재미있게 보았다.

  커닝햄의 구라로 모르몬경은 서브컬쳐의 향연으로 거듭난다.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가 짜여지더니 새로운 종교가 생겨난다. 약 빨고 만든 깨알같은 요소를 빼더라도, '구라가 은유를 담은 경전이 되다'라는 구조가 매력적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데 이야기만한 것도 없다(그렇다, 요즘 나는 정말 유난히 이야기에 집착한다!). 커닝햄의 구라가 몇 백년 후 고대 개구리를 찾는 사이비 고고학을 낳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뮤지컬이라고는 동아리 뮤지컬에 친구 얼굴이나 보러가던 내가 웨스트엔드에서만 뮤지컬을 세 편을 보았다. 무대 구성이나 연출을 보면 참 대단하다 느끼지만, 그렇다고 내가 뮤지컬에 빠질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나는 문화 활동에 음악으로 같은 돈을 쓴다면 질리도록 들은 노래 가수들의 공연을 택하고, 이야기를 찾고 싶을 때는 싸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독서가 더 좋다. 하지만 웨스트엔드에서 공연을 보며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를 깊이 알게 되었다. 모든 문화 활동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다. 뮤지컬은 많은 사람들의 재능과 열정, 조화가 어우러진 복잡한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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