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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아일랜드와 영국

5월 20일, 채스워스 하우스

  버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는데, 호스텔에 돌아오고 노트북이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부터 말썽이었던 노트북은 갖고다니기 미안할 정도로 상태가 별로다. 도미토리 방 바깥에서 종이를 깔고 앉아 아무 생각이나 쓰고있으니 오늘 머리속에 들었던 생각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진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싫어하니, 글이라도 남겨야 비싼 여행값을 할텐데 말이다..



  더블린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장소는 맨체스터다. 축구 말고는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던 도시고, 도착해서도 관람차 말고는 눈에 띄는 건물도 없다. 산업시대 소매치기가 떠오르는 벽돌 거리와, 바로 옆에 천연덕스럽게 있는 현대적인 고층 빌딩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무언가를 보러 온 곳도 아니다. 친구가 보고싶어했던 채스워스 하우스를 가기 위해 들른 곳이다.


  채스워스 하우스는 거대했고, 방마다 진귀한 물건들과 장식이 가득했다. 평생 그곳에서 살아도 모든 물건을 제대로 보지 못할 성싶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같이 관찰할 것이 많은 곳을 지나칠 때마다 느끼는 죄책감이 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내가 스쳐지나가는 그림 하나에 화가는 며칠의 노고를 쏟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에 잠깐 들렀던 자이언트 코즈웨이나 로프브릿지는 참 좋았다. 사람이 만들 수 없는 풍경을 보면서는 더 제대로 봐야한다는 의무감은 들지 않는다. 자연은 끝이 없다. 멀리 보든 자세히 보든 어차피 완벽히 느낄 방법은 없다.


  우체국에서 짐을 부치는데, 직원이 쉰 목소리로 내 짐이 돈으로 따져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냐고 물었다. 한참 생각해보니 짐 부치는데 드는 돈과 값어치가 똑같았다.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돈을 뿌렸는지 깨달았다. 채스워스 하우스 안의 작품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할지 궁금했다. 채스워스 하우스의 주인인 공작들은 대를 이어오며 행여나 왕이라도 잠깐 방문하면 방 하나를 새로 만들어 온갖 진귀한 물건들로 채우던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저택 통로에 자신의 DNA로 벽을 채우는 채스워스 공작이나, 서울 버스비가 70원이라는 사람이나, 내가 하는 후회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공작들의 호사가 그들의 공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겠지. 이름도 모르던 작은 마을에서 대영제국의 국력을 느꼈다. 대를 이어오던 공작들은 전세계에서 귀중한 보물들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더비셔의 채스워스 하우스는 아일랜드 수도의 더블린 성보다 훨씬 크고 장엄했다. 이집트 조각과 공작석 식탁을 보면서, 18세기 맨체스터에서 천식에 걸려 죽어갔을 공장의 어린 직원들부터 수탈당한 식민지 사람들까지 별게 다 떠올랐다. 덕분에 저택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던져보았다.  채스워스 하우스가 없었다면 청나라 벽지에 오동나무 조각과 네덜란드풍 도자기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에 대해  알지 못했을텐데, 그렇다면 이들을 모은 가치를 충분히 한 것일까? 대영제국 시대가 아니었으면 모으지 못했을 것들. 아마 현재 내로라 하는 부자라도 이만큼의 저택은 꾸미지 못할텐데(내가 현대 부자들을 얕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구 어딘가에 내가 상상도 못할만한 저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므로 채스워스 하우스는 가치있을까? 음, 생각을 짜내서 가치를 찾아낼바에야, 그냥 나는 자연사 박물관이나 숲에 더 취향에 맞나보다. 채스워스 하우스를 오고 가며 본 풀밭과 동물들이 참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 저택 밖에는 멋지다기보다는 재미있는 현대 미술 조각들이 많았다. 탁 트인 잔디밭에 햇살이 따가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꿩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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