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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아일랜드와 영국

5월 26일, 런던

  노트북이 이상하다. 오늘도 부팅이 안 되는 놈을 부팅 USB로 간신히 얼러서 켰다. 세상이 좋아 스마트폰으로 뭐든 되는 시대이지만,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내 노트북이 정말 고철덩어리가 되지는 않을까 불안하다. 오늘 낮에는 꼭 여행기를 써야겠다 다짐했으니, 이 늦은 밤 노트북을 달래가며 기록을 하자.


1.  몇 년 간 케백이로 쌓은 초라한 내공 덕에 나는 친구의 꽤 괜찮은 찍사가 되었다.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친구는 평생 보기 힘든 배경의 훌륭한 모델이다. 

  친구의 캐논 이오스를 찍다보면 내 케백이가 얼마나 색이 거친지(내가 맞춘 설정이다) 보였다. 캐논 DSLR은 그 바디처럼 둥글둥글한 색감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았다. 바로바로 맞춰지는 초점이며,(케백이와 16-45 콤비는 트롬소를 갔다온 이후 AF기능이 고장났다.) 큼지막한 LCD 화면, 무엇보다 정상적인 DSLR의 무게에, 정든 케백이를 버리고 새 카메라 하나 맞추고 싶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케백이 사진을 노트북에 옮겨보니 아직은 괜찮다. 남는 게 사진이라니 많이 찍어야지.

  친구와 같이 다니다보니, 내가 얼마나 '내 사진'을 찍지 않는지 알았다. 혼자 여행을 다닐 때는 누군가에게 카메라를 맡기기 어려웠다. 자동초점기능이 고장난 케백이는 유난히 다루기 어려운 카메라이고, 외국 사람들은 정말 사진을 못 찍는다. 하지만 DSLR 잘 다루는 친구가 옆에 있어도 렌즈를 보고 웃는 일이 드문 것을 보면, '유럽 사람들은 내 카메라를 쓸 줄 모른다'는 그저 핑계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진에 찍힌 나를 보기가 거북하다. 카메라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스크린 속 나는 항상 어딘가 불편하게 보인다. 거울 속의 나는 피곤해도 재미있어보이는데, 사진 속의 내 얼굴에는 그 짓궂은 표정이 없다. 그렇다고 셀카 찍기도 영 어색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걸까, 반대로 기대가 너무 큰 걸까.


  50일동안 유럽을 돌아도 내가 제대로 나온 사진 한장 건지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친구 말대로, '풍경사진으로는 내가 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 글로 남기면 된다. 과거를 돌아보는 성격은 아니지만 지금은 남은 삶에서 가장 여유있고 (어쩌면) 행복할 시기이니, 언젠가 이 글을 읽으며 행복했던 20대를 추억할지 모르겠다. 


2.  먼 훗날 이 글을 읽다보면 '그 때가 좋았지'하며 나이에 안 맞는 한심한 한숨을 쉬지만은 않으면 좋겠다. 지금 나보다야 나이가 많을테니 존댓말을 써볼까요.


  한국에 돌아가면 24살 나이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싫은 저는 지금 런던의 민박집에 묵고 있습니다. 여행은 재미있지만 항상 기대보다는 덜합니다. 여행이 심심하다는 말은 아니고, 제 기대가 실제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행에서 '이야기'를 바랐지만, 여행은 저한테 한 순간의 '장면'을만 주더랍니다. 코스요리를 바라던 굶주린 배에 날 것을 주는 꼴이죠. 요리를 하는 것, 즉 이야기를 짜는 일은 여행을 하는 제 몫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호스텔 주방에서 저녁을 떼울 서툰 요리 실력은 있어도, 낯선 거리의 건물이며 표지판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멋진 상상력은 없습니다. 대신 가는 곳마다 군것질하듯 작은 이야기를 찾고는 합니다. 제가 찾아낸 작은 이야기는 친구와의 대화에, 박물관 구석의 유물에, 투어 버스 아저씨의 스쳐 지나가는 한 마디에 숨어있었습니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김치가 땅기듯, 이 귀한 여행지에서 저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한국어로 된(!))책이나 읽고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영 박물관에서는 도서관 서가에서만 보았던 람세스며 로마인 이야기가 그리웠습니다. 이제 곧 갈 스톤핸지에서는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 신청만 했었던 아발론 연대기가 떠오르겠죠. 2차대전사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유럽에서 보내는 나날은 훨씬 달랐을거예요. 읽지 않은 책에 후회하는 만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제가 지금 읽고 싶은 책들을 예전에 읽고서 줄거리를 떠올릴 수 있다면 정말 고마울 거에요스포드 졸업생 중 도킨스가 있어 친근했던 이유는, 고등학생 시절 그의 책을 많이 접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지요. 삶은 짧고 지구에 이야기는 정말 많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 시간에 뭐든 해도 좋으니 인터넷 서핑을 좀 줄여야겠어요. 닳고 닳은 결심이지만 한 번 더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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