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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북유럽

Tromsø, Norway, 밤

  여행은 소설이 아니라 항상 멋진 서사를 남기지는 않는다. 어떤 여행에서는 발단과 결말 사이에 아무 전개가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뜻하지 않은 순간에 끔찍한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운이 조금만 더 없었다면, 그리고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었다면, 트롬소 여행은 전자로만 기억에 남을 뻔 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올려다 본 하늘에는 구름뿐이었고, 해가 진다고 해서 구름까지 산 밑으로 지지도 않았다. 




  낮에는 트롬소 섬을 돌아다니다 숙소에 들어와 쉬었고, 밤에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섬에서 불빛이 미치치 않는 곳까지 나섰다. 첫날 밤의 목적지는 섬 남쪽의 해변가였다. 버스비도 아까워 걸어가는 길은 더럽게 길었다. 인도도 없는 길에 차를 피하기 위해 도로 가장자리에 더러운 눈이 쌓인 곳을 골라서 걸어갔다. 중간중간 발이 빠져 신발에 검은 물이 스며들었다. 설레는 마음은 거친 길에도 기죽지 않아 카메라의 필터를 빼며 오로라를 찍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날 자정 쯤, 일기예보에 딱 맞게 쏟아지는 비는 '혹시 모른다'는 소박한 희망따위 사뿐히 즈려밟았다. 


  



  근처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했다. 나는 비가 언제쯤이나 그칠지 걱정하지도, 비싼 돈을 들이고서 즐기는 것이 궂은 날씨뿐인데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나보다 훨씬 큰 자연과 어찌 할 수 없는 실패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고, 그걸 느낀 나 자신에게도 새삼 뿌듯했다. 일생에 최고의 경험이 되기를 기대하며 다시는 오지 않을 극지에 왔건만, 그렇다고 꼭 오로라를 본다는 법은 없었다. 세상에는 내 노력 밖의 일이 이렇게 많다.  이제껏 노력의 보상이 있는 삶에만 익숙하게 살았지만, 사실 나는 세상의 인과관계에 찍소리 못할만큼 작은 존재이다.


인생의 교훈을 꽤 싸게 얻었다고 생각해서 도리어 기분이 좋았다. 오로라를 찍기 위해 준비한 카메라로, 깨달음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해변가를 가고 오는 길에(결국 다다르지 못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계속 감탄하며 걸어갔다. 오로라 없이도 트롬소의 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내 삶에는 노력해서 얻지 못하는 결과보다 내 노력과 상관없이 얻은 기회가 더 많았다. 지구 북쪽의 아름다운 불빛도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배려로 보는 풍경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비싼 노르웨이지만 기념품점에 가서 부모님께 보낼 엽서라도 샀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우표마저 너무 비쌌다. 편지를 쓰더라도 아일랜드에서 부쳐야지 생각하고 몇 문장 써서 배낭에 집어넣었는데, 아직까지 부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로라를 못 보고 돌아왔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난한 학생이라 투어도 신청하지 않았건만 트롬소 섬 한가운데에서 오로라를 보았다. 

다음날, 나머지 일행들이 숙소에 도착했다. 그날 밤 모두들 카메라를 챙겨 섬 한가운데 언덕의 호수로 나섰다. 

올라가던 길에 하늘에서 녹색 빛을 보았다. 하늘에 오로라가 있었다. 'Northern Light!!!'에 어느 나라 말도 아닌 괴성을 소리지르면서 고개는 하늘에 고정하고 발만 눈에 푹푹 빠지며 호수로 달려갔다. 모든 일에 시큰둥하게 딱딱히 굳은 어른의 마음이 오랜만에 녹아서 일렁였다





정작 도착한 호수에서는 오로라를 많이 보지 못했다. 몇 분 있으니 구름이 하늘을 덮치고, 그것도 모자라 우박이 내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얼음 덩어리는 진지하게, 아팠다. 종전의 흥분은 호수의 추위에 식다 못해 꽁꽁 얼었다. 바람을 피한답시고 펭귄처럼 한 곳에 모여 빙빙 돌고, 그것도 모자라 마룬5의 'One more night'를 틀고 다같이 춤을 추었다. 고요한 호수에 앵앵거리는 노래가 퍼지고, 모두들 두꺼운 옷에 팔다리만 올렸다 내렸다 하는 그 순간이 참 유쾌했다. 결국 얼마 더 버티지 못하고 호수에서 내려왔다.





 그날 밤 오로라는 딱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호수에 도착한 찰나까지만 보았다. 삼각대도 없이 iso만 높여 사진을 찍었는데, 그마저도 모두 흔들렸다. 미련은 없다. 오로라야 구글에 Northern lights만 쳐도 멋진 사진들이 수두룩하다. 나는 오로라를 보고 돌아왔다. 오로라 자체보다도 오로라를 보고 흥분해서 달려간 그 순간이 내게는 더욱 소중하다. 



다음날은 날씨가 너무 흐려서 오로라 보겠다는 욕심을 일찌감치 버렸다. 대신 떠나는 마지막 밤 기념으로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서도 중간중간 뒤를 돌아 트롬소 섬을 바라보았다. 낮의 잿빛에서 밤의 주황빛까지, 트롬소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이 작은 섬이 왜 이렇게 내게 예쁜게 보이는지 잘 모르겠다. 항구도시야 널리고 널렸고 밤의 가로등도 흔하디 흔한 나트륨색인데. 





눈 덮인 산이 뒤를 지켜서 그럴까. 한국에서는 편평한 꼭대기에 이쑤시개처럼 나무가 박힌 산이 없었다. 





궂은 날씨 탓에 산 정상의 케이블카를 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원래 케이블 카를 타기로 했었던 마지막 날은 다들 지쳐 있었다. 나도 숙소를 뒹굴거리다, 문득 이곳에 있는 시간이 아까워 아무 경험이나마 기억에 넣고 싶었다. 혼자 숙소 밖에 나가 숙소에 쌓여있던 싸구려 썰매를 집어들어 동네 언덕에서 썰매를 탔다. 플라스틱 바닥이 매끈하니 썰매는 정말 무섭게 빨랐지만, 썰매를 타라고 생긴 언덕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눈바닥에 돌아오고 보니 양쪽 허벅지에 멍이 들어 있었다눈에 굴러서인지 썰매를 타던 내내 내리던 진눈깨비에 맞아선지 온 옷이 다 젖어서 들어왔다. 





  젊을 때 트롬소에 와서 참 다행이었다. 어느새 보니 나는 세상이 내 바람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할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은 누군가에게는 시시하고 재미없을 실패조차 마냥 즐길만큼 철이 없다. 다시 오로라를 보게 된다면 트롬소 대신 다른 북쪽 나라를 가겠지, 아마 돈을 어느 정도 벌고 난 다음에나 '지구에 오로라라는 자연 현상이 있었지'라며 투어를 신청하리라. 그 곳의 나는 지금의 나만큼 흥분할 줄도 모르고, 오로라가 없는 풍경에 감동하지도 못하는 나이가 되어 있을 터이다.

  트롬소는 오로라보다 트롬소에 있던 나로서 기억에 남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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