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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9.7)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며

대학생 시절, 나의 꿈은 내가 이룬 연구가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기억할 만한 사실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의 전공도 듣고 책도 읽고 혼자 학회도 갔다. 블로그에 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 나는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오는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라는 구절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매일 할 수 있는 일. 가령 한 학기 수업에 쓰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고 할 때나 그 문장을 곱씹었지, 매일 하지 못하는 일을 꿈꾸었을 때는 그 문장을 떠올리지 못했다. 우주는 내가 매일 교과서의 한 챕터를 읽어나갈 때에는 나를 도왔지만, 교과서에 실릴만큼 대단한 연구를 하는 일에는 도와주지 않았다.

무심한 우주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거창한 꿈을 버리기로 했다. 교과서에 실릴만한 연구 아이디어가 짠 하고 나타나길 바라는 대신, 매일 하면서 발전하고, 그리하여 나 스스로가 보람을 느낄 일을 찾고 싶다.

안타깝게도 나는 매일 연구하는 삶을 살아보고 나서야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과학자가 되고는 싶었으나, 과학을 하고 싶은지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부 인턴도 해보았고, 회사로 들어간 곳도 거대한 실험실이었으니 기회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연구 자체에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연구는 가설이 맞는지 알기 위해 실험을 수행하고,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가 가설과 맞았을 때 기뻐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나에게 실험이란 모든 결과를 알고 있으나 n수를 더하기 위해서 하는 노동, 또는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무작정 하고서 실패하면 또 해야하는 노동이었다. 실험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실험 결과를 궁금해 해야 하는데, 나는 실험을 하고 얻은 데이터에 큰 애정이 없다. 실험이 잘 되면 당연한 것이고, 실험이 안 되면 내가 어디서 틀렸나 전전긍긍해질 뿐이다.

회사와 학교 실험실에 있다보니, 내가 연구보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커다란 연구가 아니라 작은 개발이었다. 나는 모두가 빙 돌아가는 길 대신 곧장 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를 찾아내 해결하고는 했다. 아무도 안 쓰던 공용 기기, 프로그램의 새로운 기능, 간단한 코딩. 이런 것들은 논문화할 가치도 없고, 꼭 연구실에 있어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 어느 곳이든 최적화할 여지는 남아있으니까.

또한 나는 생각하기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내 생각을 갖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몇 번 삽질을 하고보니, 내가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번에도 '생각하고 글쓰는 나'가 보기에 멋있어서 마냥 되려고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확실히 정하기 전 예행 연습 삼아,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 생각을 짜내고 글을 써보려 한다. 내가 남은 석사 과정 간 글을 쓰는 일을 꾸준히 한다면, 본격적으로 이 일을 삶의 업으로 삼아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할 것이다. 글쓰기가 연구실 노동에 밀려 흐지부지 멈춘다면, 나는 그저 힘든 일이 하기 싫을 뿐이니 석사 과정동안 배운 실험으로 다시 직장을 구하여 취미 생활이나 즐겨야 행복할 것이다. 이번에는 다시 한 번 우주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는데. 글을 매일 완성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문장이나마 쓸 수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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