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삼아 읽은 논문을 짧은 기사로 요약하는 연습을 했다. 과학동아 이번 호의 새로운 연구를 소개하는 페이지를 참고했다. 딱딱한 영어를 그보다는 부드러운 한국어로 옮기는 일도 어려웠지만 가장 힘든 관문은 문장마다 나오는 전문 용어였다(그런 점에서 과학동아 기사는 친절하면서도 전문성이 살아있었다).
업계에는 업계 사람들만 쓰는 말이 있다. 과학계는 그중 제일 깊고 좁은 업계이다.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연구자들끼리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나올 용어가 남들이 듣기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연구를 소개하기 전에 용어가 무엇인지부터 한 문단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고유명사는 소리대로 쓰면 된다. 생물학에서는 온갖 유전자와 단백질에 이름이 있다. 과학자는 정성을 들여 자신이 발견한 물질에 이름을 붙인다. 애기장대에서 발견한 수명 연장 단백질인 오래살아, 개구리에서 찾은 항암 물질인 개구린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도 알려진 이야기다. 이런 이름은 한국어 음차 옆에 영문명을 괄호에 넣어 쓰면 된다.
이렇게 써도 아까운 이름도 있다. 한국어라는 그물에 이름을 담아 올릴 때 충분히 건지지 못한 의미가 우르르 흘러내릴 때다. 과학자들은 연구만큼이나 발견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데 열정적이다. 며칠 전 젊고 훌륭한 학자가 하는 세미나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단백질이 채널로돕신(Channel rodhopsin, ChR)이라는 단백질에서 유래했고,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으로 찾아으며 붉은 빛(carmine)에 반응한다고 ChRmine이라고 이름붙였단다(http://techfinder.stanford.edu/technologies/S18-547_a-novel-red-shifted). 이런 이름은 카민이나 카마인으로 음차하기가 아쉽다.
또 다른 문제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어들이다. 과학에는 자기들끼리만 쓰는 보통 명사가 아주 많다. 오죽하면 의대생의 첫번째 관문이 몸에 있는지도 몰랐던 수백 곳을 외우는 해부학 수업이겠는가. 이런 용어를 한국어로 바로 옮기기는 어렵다. 과학자들끼리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도 일쑤다. 전공생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영혼 없는 번역서는 이렇게 태어난다. 같은 페이지에 미토콘드리아와 사립체가 동시에 나오고, mPFC가 내측전전두피질과 안쪽앞이마이랑으로 섞여 번역된 책에 절망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과학자 집단 안에서 자기들끼리 가르치고 소통하기 위해서라면 서툰 글도 봐줄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독자가 글을 읽기 바란다면 엄격해져야 한다. 배경 지식과 개념도 없는 사람들에게 밑바닥부터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싶다. 그럴 때는 길이가 길지언정 그 뜻을 어림할 수 있는 용어를 이용해야 한다. 물론 글 안에서 독자를 길들이는 과정도 필요하다. 매 문장의 주어가 안쪽앞이마이랑이면 읽을수록 집중력이 떨어질 터이다. 차라리 한자로 된 용어가 나을 때가 있다. 한자는 음에서 뜻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어서 경제적이다. 사람들이 이미 널리 아는 용어는 다른 말로 옮길 필요가 없다. 내가 글을 쓴다면 미토콘드리아는 미토콘드리아로, mPFC는 '내측 전전두피질(안쪽앞이마이랑, medial prefrontal lobe, mPFC)'이라고 사용하고 싶다.
과학이 어려운 이유는 절반은 숫자요, 나머지 절반은 용어다. 독자를 위해 한자어로든 고유어로든 말을 풀어썼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독자에게 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럴 때는 비유라도 써야한다. 그래도 부족할 성싶으면 그림을 그려서라도 머릿속에 개념을 세워야 한다. 과학을 설명하는 글은 독자에게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재미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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