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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인지과학

인지과학이란 존재하는 학문인가

  블로그의 플러그인 중에는 '이 블로그를 방문한 누군가가 어떤 열쇳말로 이 블로그에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아일랜드 사진을 올리던 때는 '아일랜드'나 '아일랜드 영어' 가 많이 떴는데, 인지과학 글을 올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인지과학 키워드가 늘었습니다. (그에 비해 인지과학 글은 거의 끊겼네요.. 열심히 써야겠습니다.) 그중 '인지과학이란 정말 존재하는 학문인가' 라는 검색어가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인지과학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제 마음 한구석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던 의구심도 저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됩니다. 이참에 저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인지과학이란 하나의 실체가 있는 학문일까요?




1. 인지과학에 인지과학만의 특별함이 존재하는가?


  인지과학은 흔히 융합형, 통섭형 학문이라고 불립니다. 인지과학은 대표적인 심리학, 철학, 언어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인류학 외에 수많은 학문을 토대로 사람의 앎에 대해 탐구합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독립된 영역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단적으로, '인지과학자이자 무언가'인 누군가는 있어도 '오직 인지과학자'인 사람을 찾기는 힘듭니다. '언어 본능'으로 유명한 스티븐 핑커는 심리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이고, '로봇 만들기'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 로드니 브룩스도 훌륭한 인지과학자이지만 로봇학자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인지과학 개론을 들으면서도, 강의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이 인지과학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어놓았을 뿐이지 다른 분야의 기초가 될 내용을 짧게 설명하고 지나간다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언어가 관여하지. 그 유명한 사피어-워프 가설 있잖아'

 '아, 그 언어학개론 첫 시간에 나오는거?'

'존 설의 중국어방 논증은 인공지능을 논박할 수 없어. 적어도 방 밖에 있는 사람은 방 자체를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일테니까'

'철학 얘기를 하려면 먼저 설명을 하고 시작하지?' 

 'NCC라고 들어봤어?  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라고, 의식과 최소한 대응되는 신경 활동을 찾는 거지. 이제 의식이 뇌의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역시 신경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어렵겠구만, 원숭이 몇 마리가 또 죽어나가겠네' 

'시리한테 서울과 더블린 간 거리를 물어본 적 있어?' 

'seoul to dublin만 말해도 8977km라고 나오네. 이것도 인공지능인가?' 



이런 식이죠. 인지과학에 대한 담론은 인지과학 자체를 모르더라도 그에 해당하는 학문에 대해 잘 안다면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독립된 영역이 없는 인지과학은 그저 허울좋은 이름일 뿐일까요. 



2. 인지과학 없이도 인지과학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가?



  만약 인지과학이 여기저기서 지식을 짜깁기한 허울일 뿐이라면, 인지과학이라는 체계 없이도 각기 학문의 영역에서 인지과학의 목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지과학의 목표는 (추상적이지만) 사람의 앎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인지과학'이라는 말이 없는 세상에서도 가능했을까요? 심리학에서 마음에 따르는 행동을 제외한 앎만을 연구하고, 인간 지능이라는 기초 지식이 없이 인공 지능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가능했다면 어디까지 진행되었을까요? (저는 인공지능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울프럼 알파나 구글 글라스가 인간의 마음과 뇌를 얼마나 참고하고 본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거대한 언어학에서 사피어 워프 가설은 작은 이론일 뿐이고, 신경과학에서도 의식에 대한 연구는 임상부터 뇌공학 기계까지 뻗치는 넓은 범위의 한 갈래일 뿐입니다. 학문의 세계는 크고, 각 학문에서 '인지과학과 관련된 분야'는 그 학문의 주류가 아닙니다. '앎'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매우 복잡합니다. 인지과학이라는 공통된 무대가 없었다면, 사람의 앎을 이해하는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인지과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지과학의 존재에 대해 작은 변명을 했지만, 그럼에도 인지과학이 독립된 분야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인지과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요? 융합형 학문이니만큼 전공을 가리지 않고 각 분야에서 사람의 생각과 마음, 앎에 대한 내용이 있다면 싸그리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학의 한 토막이 인공지능 연구의 중요한 영감이 될 지도 모르고, 문화 간 사소한 차이가 사람의 의식을 알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하고 방대한 토대야말로 제가 인지과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지과학은 수집가의 취미 활동이 아닙니다. 적어도 한 분야에서 정통하지 않는다면 인지과학을 취미로 공부할 수는 있어도 거기에 새로운 지식을 보태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분야를 탄탄히 한 이후에 인지과학에 어울리는 주제로 연구를 해야 합니다. 물론 같은 주제라도 인지과학이 아닌 다른 학문에서도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지과학이라는 무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는 관심있는 다른 인지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주제가 됩니다.

  모든 학문은 사람이 이루어냈습니다. 인지과학은 학문을 하는 '사람'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렇기에 인지과학은 그 모든 학문과 ('이걸 밝혀낸 사람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는) 연결점이 존재합니다. 이 같은 학문이 방대하지 않으면 이상합니다. 인지과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그 거대한 세계의 모든 것을 밝혀내기는커녕 하나라도 제대로 알 수도 없겠지만(이는 다른 학문들과 비슷하네요; 어느 분야든 학문은 정말 큽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대한 접점을 찾아 중요한 목표를 완성해나간다는데 인지과학의 의의를 두면 좋겠습니다.




4. 사족



  역사학도가 역사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트위터에 한 줄 올리고, 물리학도가 물리학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페이스북에 올린다고 해서 누가 뭐라할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상하게 인지과학에 대한 글은 블로그라는 개인적인 공간에 올리는데도 부끄럽고 감히 인지과학에 대해 말해도 괜찮을까 부담스럽습니다. 글에서 언급했듯 인지과학이라는 학문이 너무 방대한데, 저는 아직 제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인 성싶습니다. 결국 아직은 전공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까요. 할 것도 없는 이곳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포기했다면 나머지 인지과학이라도 제대로 배우고 정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