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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인지과학

인지 과학 개론 정리 12-2. 현상적 의식

점점 강의의 소감록으로 바뀌고 있지만, 이 글은 Fred Cummins 교수의 Introduction to Cognitive science 강의의 요약 및 정리글입니다. 수정 사항이나 보탤 의견을 자신없이 환영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정보 처리 의식과 현상적 의식은, 얼핏 보면 무엇이 다른가 싶지만 내용의 분야나 깊이가 확연히 다릅니다. 호주의 인지과학자이자 과학 철학자인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에 대한 어려운 질문과 쉬운 질문을 구별하면서 '현상적 의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1. 의식에 대한 쉬운 질문들


  여기서 언급할 차머스의 '쉬운 질문'은 절대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쉬운'이란 '과학의 힘을 빌려 해결 가능할'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들 역시 제가 죽기 전에 밝혀질지 모를 어려운 물음입니다.


  • 정보 접근 의식은 정보를 골라서 처리할까요? 왜 어떤 정보는 의식 위에서 처리되고, 어떤 정보는 그렇지 않을까요? 
    각성 상태와 수면 상태의 의식은 다를까요? 최면은? 코마 상태는?

  • '의식의 신경 연관 부분(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NCC)'란 무엇인가? 

우리의 의식은 뇌 어디서 발화할까? 우리가 무언가를 의식할 때 뇌에 발화하는 최소한의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부분을 NCC라고, 의식의 정체라 불러도 될까요?

처음 타자 연습을 하던 때와, 지금, 타자를 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손의 움직임은 같은데 뇌의 활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 시각 처리 경로가 배측 경로(어디?)와 복측 경로(무엇?)로 나누어지는데, 왜 우리는 이를 구별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정작 우리 두개골 속의 활동을 알아차리지 못할까요?


그렇죠. 참 쉬워보이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차머스가 말하는 '어려운 질문'은 대체 얼마나 답이 없을까요?


2. 의식에 대한 어려운 질문 - 현상적 의식


어려운 질문이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무언가를 무언가로 느끼지?'

...이상하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현상적 의식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감각질'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감각질(qualia)이란 빨간 색을 볼 때의 빨강이나 고통을 느낄 때의 고통처럼, 우리가 주체로서 느끼는 자체를 말합니다. 색깔은 빛의 파장에 따라 달라지지만, 우리는 색을 그저 색으로 볼 뿐이지요. 제 눈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모니터에서 나오는 광자는 제 망막의 시신경을 자극해서 뇌에 전기 자극을 전달합니다. 1차 시각 피질까지 간 시각 신호는.... 이를 전기 신호라 하든, 뉴런의 발화라 하든, '제'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감각질에 대한 유명한 사고 실험으로, '메리의 방'이 있습니다. 메리는 조금 이상한 부모님 덕에 흑백 방에서 살아가며 책과 흑백 TV로 세상을 알아왔습니다. 신경과학자가 되고싶었던 메리는 색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파장의 빛이 어떤 색을 띠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뇌에 도달하는지, 뇌에 도달한 색은 어떻게 시각 정보로 처리되는지... 적어도 '물리적'지식에 대해서 메리는 색에 대해 완벽히 숙지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님을 둔 우리와 메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메리가 방을 떠나 처음으로 빨간색을 볼 때, 메리는 무엇을 습득하게 될까요? 우리가 메리보다 약간 더 잘 아는 '빨간색', 지식과는 다른 무언가, 그것이 감각질입니다. 


  감각질의 '1인칭성'에 대한 이야기로 과학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의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박쥐가 되면 어떨까요? 아시다시피 박쥐는 초음파로 원근을 판별합니다. 그렇다면 박쥐는 귀로 세상을 보는 것일까요? 예전에 호기심 천국이었나, 사람들의 눈을 가린채 가까이 가면 소리가 나는 헬멧을 씌우고 미로를 통과시키는 이상한 실험을 보았습니다. 당연하지만 박쥐는 '저런 식으로' 세상을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으로 세상을 보는 우리는 소리로 세상을 인식하는 박쥐의 세상이 어떤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박쥐도 우리의 세상에 대해 상상도 못할테구요. 원추 세포 종류가 하나 더 있다는 새나, 적외선을 본다는 나가뱀, 이들의 감각질과 우리의 감각질은 전혀 다릅니다. 논리를 확장해서 저는 당신이 보는 세상이 저와 같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객체로 가득차있지만, 감각질은 주체만이 갖는 무엇입니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이 아직도 잘 실감나지 않는다면, 차머스가 좋아하는 좀비를 데려와 봅시다.



3.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s, p-zombies)


  차머스의 좀비는 등짝을 때리면 비명을 지르고 불닭볶음면을 먹고서 물을 찾는 둥,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자극에 반응하지만 '의식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 좀비들도 저처럼 모니터에 있는 광자를 받아들여 신경 신호로 바꾸고, 뇌에서 처리한 후 그에 맞는 운동 명령을 내려 손을 움직입니다. 앞 문장에 의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뇌와 똑같은 구조를 지니면서도 '현상적 의식 활동'이 없는 좀비를 충분히 가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차머스의 주장대로라면) 이 세상이 설명 가능한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물리주의(physicallism)' 이론에 모순이 생깁니다. 물리적으로 똑같은 존재에 의식의 유무가 다르다면 그 '의식'은 물질 너머의 무언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데니얼 데닛과 더글라스 호프스테터의 'The mind's I(한국어 번역판_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책에서, 감각질 좀비를 까는 짧은 이야기가 나옵니다(누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아일랜드의 낙원 생활을 즐기다 한국에 돌아가기가 끔찍하게 싫어진 캬닥이(가명)는 귀국 전날 자살을 결심하지만 한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님이 마음에 걸려 차마 자살을 실행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던 중, 의문의 누군가가 캬닥이에게 '영혼을 죽이는 약'을 가져다줍니다. 이 약을 마시면 영혼은 죽지만 몸은 그대로 살아있어 의식 없는 좀비로 살아가리란 것입니다. 자신이 좀비가 되어 살아갈 것을 목격하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힘든 삶을 끝내는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킬 최고의 방법이라 생각한 캬닥이는 마지막 비행기에서 약을 먹으리라 결심하고 챙겨둡니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캬닥이를 보다못한 친구가 그가 항상 쓰던 물컵에 몰래 약을 넣어두었다면? 귀국 전날 캬닥이는 생각 없이 물컵에 물을 따라 마셨습니다. 다음날, 좀비가 된(?) 캬닥이는 비행기에서 승무원에게 물 한잔을 부탁한 후 약을 먹습니다.


'어라, 아무 변화도 없잖아? 역시 사기였어.'


  캬닥이는 언제부터 좀비가 되었을까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단순히 '물리적 존재가 아닌 영혼을 물리적 존재인 약이 없앨 리 없으니 그딴 약은 없다!'가 될 수도 있고, '좀비가 두 번 될 수 없으니 처음부터 좀비란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4. 현상적 의식과 관련된 다른 개념



  (현상적) 의식은 심리학에서의 각성(Awareness)나 주의(Attention)와도 연관됩니다. 서로 겹치는 개념이 많아서 하나를 따로 떼어놓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무언가를 감각하지만 그에 주의(Attention)하지 않는 정신 질환이 있습니다. 뇌 한쪽이 손상된 일측성 무시 증후군(Unilateral neglect syndrome)환자들은 세상을 한쪽 면으로만 봅니다. 시계도 12에서 6까지만(또는 6에서 12까지만) 알아보고, 피자를 먹을 때도 반만 먹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시각이 훼손된 것도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다른 쪽 세계를 맞춰보라고 할 때 이들은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증세는 실인증(Agnosia)과도 비슷합니다. 실인증 환자들은 감각과 운동 기능이 멀쩡하지만 이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시각 실인증 환자에게 닭 그림을 보여주고 따라 그리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따라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무엇인지 물으면 아마 '치킨'이라고 답할 겁니다. 하지만 이 환자들은 닭 그림을 보고도 닭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들로 보아, 감각과 의식은 뇌의 다른 기능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몸은 모든 일에 의식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다음 문장을 떠올리는 저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타자가 '자동화(Automatization)'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동화된 움직임을 의식하기는 의외로 힘듭니다. 스트룹 효과(Stroop effect)에 대한 실험을 하면 우리가 얼마나 의식없이(...) 세상을 인식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의식은 과학이 연구하기 제일 골치아픈 주제 중 하나입니다. 과학의 필수 조건 중 하나가 누가 어디서 관찰하든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객관성인데, 주관 그 자체인 의식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과학은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의식과 주관성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가치 판단이나 동물의 고통 같은 철학적 난제를 과학으로 풀어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