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개인적 경험과 역사로 이루어진 존재로 자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과거 기억의 산물일까요?
- 교환 학생 기간 동안 저는 정말 여러가지 경험을 했고, 여러 대화를 나누었으며, 여러 지식을 배웠습니다. 어떤 건 어제 일인양 기억이 생생한데 어떤 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잊어버렸죠. 저의 '잃어버린 기억'은 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저 자신이 과거 기억의 산물이라면 잊은 기억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걸까요.. 그렇다면 계좌에서 쑥쑥 빠져나갔던 그 여행 비용은?!!
기억이란 무엇일까요? '기억(Memory)'은 '의식(Consciousness)'보다야 훨씬 연구가 진척된 분야이지만, 기억을 정의하기는 의식을 정의하는 일만큼 힘듭니다.
1. Henry Molaison
간질 환자 H.M.은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기억 연구에 기억할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계속되는 간질에 일상 생활이 불가능했던 H.M.은 결국 그 동네 잘 나가던 의사를 찾는데, 그는 H.M.의 내측 측두엽을 절제합니다! H.M.의 간질은 꽤 줄었지만 수술 전 3년의 기억이 싸그리 날아간데다 수술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처지는 안타깝지만 그는 이후 기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 최고의 연구감이 되었습니다.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된지 명확할뿐더러, 감각이나 추론 등 기억 상실 외에 나머지 정신적 기능이 멀쩡하니 기억을 연구하는데 이만한 실험 대상도 없었습니다. H.M.은 2008년에 죽어 이름이 공개되었고 뇌가 해부되었습니다.
H.M.의 기억 장애는 순행성 기억 장애(Anterograde Amnesia)와 역행성 기억 장애(Retrograde Amnesia)가 혼합되어 나타났습니다. 그의 역행성 기억 장애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렸을 적 기억은 완벽했으니까요. 반면 순행성 기억 장애는 끔찍했습니다. H.M.은 매일 진찰하는 의사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H.M.의 사례에 의해 기억은 뇌의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리라 여겨졌습니다. 어찌되었든 그의 어릴 적 기억은 멀쩡했으니까요. 또한 H.M.은 그림 그리기 등의 간단한 기술을 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어떻게 기술을 습득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말인즉슨, 기억이 여러 종류로 분류 가능하고, 뇌의 다른 부분에서 처리된다 것입니다.
2. 기억의 분류 - 장기 기억과 단기 기억
기억을 분류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정보 처리 방식에 따라 기억을 나눌 수 있습니다. H.M.은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잠깐만, 대화를 한다는 건 타인의 앞 말을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연구자들은 기억에 장기 기억(Long term memory)와 단기 기억(Short term memory)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습니다. 후에 단기 기억은 단순히 기억 외에도 순간순간 여러 정보를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작업 기억(Working memory)으로 개념이 확장됩니다. 이외 지금 당장의 감각에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몇 초짜리 감각 기억(Sensory memory)도 있습니다. 감각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음절 'pa'를 듣다가 p를 기억하지 못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단기 기억은 장기 기억에 비해 지속 시간이 짧고 용량도 부족합니다. 단기 기억의 용량은 '마법의 숫자 7±2'밖에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조지 밀러의 실험에 따르면, 따로 단서가 없는 이상, 음절이든 어절이든 단어든 우리 단기 기억은 7개 남짓밖에 기억하지 못합니다. 전화번호가 3자리/4자리로 총 7자리인 것도 이 단기 기억 용량과 관련있다고들 합니다. 반면 장기 기억은 최대 죽을 때 까지의 지속 시간과 최대 무한대(?)까지의 용량을 자랑합니다. 뇌의 부피는 유한한데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뇌의 기억 처리 방식이 정말로 신비하거나, 그저 우리는 잊어버리는 일 조차 잊어버렸거나 둘 중 하나일 성싶습니다.
배들리의 작업 기억 모형은 단기 기억이 단순히 정보를 잠시 저장하는 역할만 할뿐아니라, 그곳에서 실제로 정보를 처리한다는 점에 착안한 모형입니다. 물론 이 모형은 나온지도 오래되었고(1974년) 뇌의 어디가 작업 기억의 어디라니 하는 물리적 증거도 없습니다. (2학년 심리학 개론 시간에 작업 기억 모형에 대해 배우다가, 심리학이 이렇게 뜬구름잡는 학문이었나 하고 멘붕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념 자체는 작업 기억을 이해하는데 명쾌합니다. 단서 없는 음절의 나열은 7개만 되어도 외우기 힘들지만, 서로 의미가 연결된 단어라면 우리는 쉽게 암기합니다. 기억하는 동시에 정보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차이는 발생하지 않겠죠.
작업 기억 모형에서 작업 기억은 중앙 처리 장치(Central executive), 시각-공간적 스케치 판(Visuo-spatial sketch pad), 음운론적 고리(Phonological loop)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괜찮은 한국어 번역 용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중앙 처리 장치는 주의해야할 정보를 구분하거나 의미에 따라 정보를 묶습니다. 무언가를 암기해야 할 때 우리는 가끔 그 단어를 여러 번 혀에 굴립니다. 이와 비슷하게 음운론적 고리는 언어에 대한 기억을 되뇝니다(rehearsal). 시각-공간적 스케치 판은 언어적이지 않은 정보를 스케치북에 크로키하듯 저장합니다.
3. 기억의 분류 - 선언적 기억과 절차적 기억/ 자서전적 기억
처리하는 정보에 따라서도 기억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이 떄의 기억은 장기 기억입니다.) 아일랜드의 수도, 어제 영화관에 가던 길의 잔디밭, 칼날 여왕의 정체.. 이 모든 것은 말로 표현 가능한 선언적 기억(Declarative memory)입니다. 반면 자전거 타기, 무치를 그리는 방법, 아주 조금씩 늘고 있는 영어 독해 능력 등은 절차적 기억(Procedural Memory)에 해당합니다. H.M.은 사고 이후 선언적 기억을 하지 못했지만 절차적 기억 능력은 그대로 살아있어 간단한 기술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익혔습니다.
선언적 기억은 또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일화적 기억(Episodic Memory)는 언제 어디서 겪었던 경험이나 감정에 대한 기억입니다. 어제 보았던 공터, 킬라니 국립 공원의 풍경, 엄니가 데려간 고깃집, 블로그의 글설리...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바로 일화적 기억입니다. 의미적 기억(Semantic Memory)는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실과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실은 어디에 분류해야 할까요?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은 '내가 교환 학생으로 온 학교의 이름은 University College Dublin이다' 같은, 일화적 기억과 의미적 기억 두 부분에 겹치는 기억을 의미합니다.
자전적 기억에 대한 연구도 흥미롭습니다. 아무거나 기억해보라(자유 회상, Free recall)고 하든, 옛날 장난감 하나를 주고 생각나는 걸 말해보라고 하든(단서 회상, Cued Recall)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밤을 새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유아기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유아기 기억 상실(Infantile Amnesia)은 그 시절 유아의 뇌에 기억과 관련있는 해마나 변연계, 편도체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반면 사람들은 청년기나 사춘기 시절의 기억은 유독 잘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회고 절정(Reminiscence Bump)라고 합니다. 회고 절정이 일어나는 시기는 자아 형성에 매우 중요한 시절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회고 절정이 두 번 일어난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분리되어 '방글라데시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했던 이들은 사춘기 시절 외에도 방글라데시 전쟁 시절을 많이 떠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4. 기억의 분류 - 확장된 기억 / 집단 기억
인지의 개념은 뇌를 넘어선지 오래되었습니다.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에는 제 손가락이 닿아있는 노트북과 한시도 제 곁을 떨어지지 않는 스마트폰도 포함됩니다. 평소에는 온갖 뜬생각을 하고 다니다가도, 책상 앞에서만큼은 인지과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제 책상 또한 저의 인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억'은 확장된 마음 개념과 잘 어울립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대신 포스트잇에 써 책상 끄트머리에 붙여두면, 이것이 다름아닌 '확장된 기억(Extended memory)'입니다.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이란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기억하며, 그 기억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유럽인들에게 홀로코스트가, 미국인에게는 9.11 테러가 집단 기억의 예시가 되겠죠. 몇 년 후에 세월호 사건이 집단 기억의 예시가 될 걸 생각하니 서글프네요. 아마 지금 세대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영원히 이 사건을, 사건 자체가 아닌, 서로의 기억에 변형된 상태로 기억할 겁니다.
5. 뇌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 - LTP
뇌는 어떻게 '기억'을 할까요? 기억이 뇌의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라면, 기억이 추가되거나 사라지는데 따라 뇌의 구조도 변해야 합니다. 이전 글에서 정보 처리 방식이나 정보의 종류에 따라 기억을 분류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기억의 종류에 따라 뇌는 어디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지금보다 100년도 한참 넘은 1894년, 스페인의 생리학자 라몬 이 카할은 신경 세포(Neuron)를 관찰하고, 그것들이 서로 접촉해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연접(Contiguous)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에 그는 기억이 뉴런 간의 연결에 의해 생성 및 강화된다는 대담한 이론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100년 전부터 새로운 기억 하나에 새로운 신경 세포 하나가 자라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도널드 헵은 카할의 제의에 영감을 받아, 자주 발화하는 두 신경 세포 사이의 연결이 강화된다는 장기 상승 작용(Long-term potentiation, LTP)을 제의합니다. 뉴런 A의 축삭이 뉴런 B의 수상 돌기를 흥분시킬 만큼 두 뉴런이 가까이 있으며, 실제로 지속적으로 A가 B를 발화하는데 작용한다면 두 세포 어딘가에서 성장이나 대사적 변화가 일어나 A의 발화 효율이 높아지거나 B의 발화 자체가 늘어날 것입니다. 즉, 여러 번 동시에 일어나는 발화는 연관됩니다.
LTP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두 뉴런간의 연접, 시냅스(Synapse, 교수님이 '사이냅스'라고 읽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뉴런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시냅스라는 공간만큼 떨어져 있으며, 뉴런 내 신경 신호가 세포 안팎의 이온 차이에 의해 전기적으로 전도되는 반면 시냅스 부분에서 신경 신호는 신경 전달 물질에 의해 화학적으로 전달됩니다. LTP는 1) 시냅스 전 뉴런의 신경 전달 물질 소포가 늘어나거나, 2) 시냅스 후 뉴런의 수용기 숫자가 늘어나거나, 3) 두 뉴런 사이에 원래 있던 시냅스 외 새로운 연접이 생겨나거나, 4) 두 뉴런의 형태가 바뀌는 등(ex. 수상 돌기가 짧아짐) 여러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73년 블리스와 로모는 전기적으로 자극을 반복한 뉴런의 시냅스가 전달이 강화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발견합니다. 이후 시냅스 가소성에 대한 연구가 늘면서 LTP는 물론 장기 억압(Long-term depression, 신호가 자주 올 때 시냅스가 약화되는 현상), 새로운 시냅스의 성장 및 가지치기 등에 대해 알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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