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중학생 때부터일테다. 사진이 재미있었다.
나만큼 사진을 좋아하던 친구와 교복을 입은채 카메라를 든 모습을 서로 찍은 사진이 서랍 어딘가에 있을 정도이다.
그 때 카메라는 Canon S3 IS라고, 용산에까지 가서 산 (하지만 내수를 정품 가격으로 사기를 당한) 어찌되었든 좋은 카메라였다.
하이엔드 카메라에 필터도 달고 후드도 사고 컨버터도 만들어(!) 달면서 사진장비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당연한 수순인 양 멋진 DSLR을 선망하게 되었다.
지금은 잃어버린 고1 때의 주간 플래너(책상에 세워놓고 7일 간격으로 넘기는 길다란 탁상 스프링 그림일기장이었다)에는
그날 읽은 책부터 수업 이야기, 추상적인 무늬까지 별별 그림을 그렸었는데,
내가 갖고 싶었던 펜탁스 K100D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그림을 그렸다.
인터넷을 찾아 본 카메라를 연습해서 그대로 따라그리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도 많이 그렸다. 내가 생각한 케백이 이미지는 딱 저랬다.
그 길쭉한 그림일기장을 잃어버린게 아쉽기만 하다.
무슨 착한일을 했길래 부모님이 카메라를 사주셨다. 2007년 6월 15일이었다.
기쁜 마음에 그때 하던 블로그에 단박에 개봉기를 올린 덕에 날짜가 남아있다.
저 박스도 아마 버렸을테다.
(저때까지만해도 번들 렌즈가 멀쩡했다! CPL 덮개도 그대로 있다!)
내 케백이는 나에게 벅찬 카메라였다.
번들렌즈 하나로 우주를 정복할 기세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수박도 찍고
(사진의 틀을 만들어 놓은 걸 보면 카메라 기종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비가 그치자마자 밖에 나가 아파트 하늘을 찍어오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때 사진은 컴퓨터를 새로 바꾼 탓에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 CPL 필터도 사서 끼우고 돌아다녔다.
저때 찍은 간판에 고깃집이 지금은 망한 걸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모종의 사정으로 그 때 끼운 CPL 필터는 빠지지 않게 되었고, 위아래가 반대로 끼워진 후드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때가 2007년 8월 11일이니...
외갓집 담벼락에 꽃도 찍고
비 오는 날 처마 아래서 흐르는 물도 찍었다.
귀찮았는지, 사진 포스팅은 닥치고 최대한 큰 사이즈로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사진 틀이 사라졌다.
한일중고생교류로 일본에 갔을 때는 하루에 몇 백장을 찍었다.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기했다.
운동회 때는 단체사진을 찍어주고 내 돈 들여 인화해 나눠주기도 했다.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바퀴를 도는 선배들을 패닝샷으로 찍는 짜릿함이란.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또 사진을 좋아하셔서, 네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주시기도 하셨다.
고등학교 학년이 올라가며 슬슬 사진과 멀어졌다.
고3, 재수를 거쳐 '자유의 몸'이 된 대학생 때는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서도 오히려 사진을 잘 찍지 않게 되었다.
1학년 때 출사를 딱 두 번 나갔을 정도였다. 차라리 동방을 청소하는데 들인 시간이 더 많았을테다.
봄 출사. 장소는 교정, 친구 얼굴이 구석에 찍혀서 스티커로 가렸다.
이때부터 묘하게 카메라가 초점이 안 맞기 시작했다. 비네팅은 CPL필터 때문에 후드가 움직이지 않게 된 이후로 계속 생겼다(...)
그래도 우리 학교는 사진 찍기 참 좋은 곳이다.
그 동안 케백이는 언니가 들고다녔다.
언니는 케백이를 들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예쁜 물건 사진으로 파워블로거가 되었다.
대학 2학년 때, 인터뷰 수업 때문에 카메라가 필요했다.
언니에게서 카메라를 돌려받아 목에 걸고 인터뷰를 하러 갔다. 그런데!!
LCD로 확인할 때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사진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교수님이 말하는 앞에서 찰칵찰칵 소리도 크게 몇십 장을 찍었는데
세상에, 제대로 건진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사이즈를 줄여서 제출은 했다. 사진은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 연구실)
나중에 알고보니 핀이 엇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냥 고장이라 생각했고, 카메라가 재기불능이 되었구나 싶었다.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다. 언니는 흐릿흐릿한 케백이 대신, 다른 카메라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케백이는 집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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