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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일기(2013~)

2014.12.11

이전 글을 전부 비공개 처리했으니, 2015년부터 카테고리를 새로 파서 새로이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써지지 않는 레포트와 아무 말도 안 나오는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에 마음이 답답하다. 글감도 잘 잡았으니 손 가는대로 글을 써보자. 어차피 이런 것 말곤 달리 할 능력도 없다.



  자기 전, 그날 하루 다 쓴 만년필에 잉크 넣기를 좋아한다.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순수하게 '만년필에 잉크를 넣기 위한'행동을 한다. 펜을 분해해서 컨버터를 꺼내고, 컨버터 꼭지를 잉크병에 담가 나사 손에 잉크가 묻지 않게 조심하면서 손잡이를 돌린다. 작은 원통에 잉크가 서서히 들어온다. 잉크병을 잠그고 펜을 다시 조립한다. 작년에 산 남색 잉크도 많이 써서 거의 바닥이다. 그래서 요새는 잉크 표면까지 컨버터를 넣기 힘들다. 닿았다고 생각하고 나사를 돌려도 공기만 들어오고, 잉크를 넣으려고 손가락 버둥을 치다보면 어느새 손이 푸른 물 범벅이 된다. 그래도 좋다. 하루 동안 얼마나 펜을 썼는지 확인한다. 하루 중 대부분 시간을 그 순간이나 미래를 위해서 쓴다면, 잉크를 넣는 때만큼은 하루를 되짚는 시간이다. 반성도 후회도 없이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펜을 많이 안 쓰는 때는 며칠씩 잉크 충전을 거르기도 하지만, 그날치 잉크를 다 쓰지 않았는데도 잉크를 채우는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밤이다. 시험기간이지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컨버터에 잉크가 절반 남짓 남았다. 빈 만큼 잉크를 넣으면 어찌되었든 펜은 잉크로 꽉 찬다. 내일은 이만큼은 다 쓰리라 생각한다. 노력은 하지 않았는데 보상은 받고 싶고, 부담은 내일로 넘기는 식이다.

  시험 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오고 계속 겪었던 갈등과, 빗나간 적성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하루의 성과를 펜을 얼마나 썼는지로 기준을 두는 사람이고, 펜을 다 쓰면 하루가 보람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반성을 했는데, 그렇게 살면 안 되나 보다. 나의 삶은 만년필에 들었던 잉크로 보람을 느끼면 안 되는 삶이다. 그러니 내 노력에는 보상도 보람도 없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죄책감만 늘어가는데, 그런데 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있으니, 이건 좋아해야 할 일인가. 뿌듯할 일인가. 하루라도 빨리 길을 포기하고 돈을 벌 방법을 찾아야 하나.

  나의 노력은, 그런 게 아직 있다면, 있더라도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가 다 되었는데도 가난한 부모에게 용돈을 받으면서, 스스럼없이 돈을 쓴다. 매번 돈이 없다고, 과외 자리라도 찾아보겠다고 노래를 하지만 전력으로 일자리를 구해본 적은 없다. 열정을 쏟을 자신이 있는 유일한 일마저 꿈을 좇으며 빚만 불어날 일이다. 맞지도 않는 노력을 하면서 염치없이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이만큼 하고 있어, 이 정도면 자기 전에 펜에 잉크 넣는 만족감은 느껴도 되잖아, 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그러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했으면, 내가 이만큼 할 능력이 있으면,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한 번 살고 죽을 거면서 고작 이런 욕심도 못 부리나나 싶으면서도, 그게 안되면 포기해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왜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할까. 가족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으면서 정작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건 부담 수준이 아니라 등에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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