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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견문

2학기 수강 초기 감상


  3월달, 의욕이 가득찼던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공부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름방학 때 영어학원을 그만두며 할 수 있는 일에 감히 공부를 넣을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생활, 공부 외(당연히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활동들을 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에마저 공부를 넣어야 할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입학 이후로 6개월이 지났습니다. 빠르면 빠르고 느리면 느린 변화입니다. 당연한 단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를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잘 극복하리라 혹은 익숙해지리라 믿습니다. 게임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으니까요.
 
  '컴퓨터와 마음'강의는 재미있습니다. 1.5교시 수업이라 9시 반까지 강의실에 가야하는, 2학기 중 가장 이른 시간 강의입니다. 지난 학기 9시에 수업받은 화학 강의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죄송합니다, 교수님. 일어나서 2교시 수업은 잘 들었습니다.ㅠㅠ), 컴마는 잠이 올래야 올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와 마음'은 쉽게 '인지과학 개론' 강의입니다. 인지과학자가 인생 최종목표인 제가 인지과학 개론이 재미가 없다면 저는 인생의 각도를 초반에 치기로 잘못 잰 것이 되겠지요. 아직 제 삶은 목표했던 각도 안에 있는 모양입니다. 책으로만 보고 잊어버렸던 내용을 수업시간에 듣는 것만으로도 감동입니다! 거기에 교수님도 참 재미있으십니다. 보통 사람 1.2배속 빠르기에 설명 하나하나가 명쾌합니다. 철학과 교수님들은 다들 그렇게 말을 잘 하는 걸까요.
  이 강의만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바로 ETL의 토론 게시판입니다. 소심한 탓에 인터넷상에서 키보드 배틀 한 번 떠 본적 없는 저도 토론을 열고, 다른 학우분들의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강의 후부터 열심히 글을 올렸습니다. 누구에게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내용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누군가가 제 의견을 읽고 다른 의견을 달아주며 진행하리란 기대는 '누가 내 글에 욕하면 어쩌지'하는 걱정마저 뛰어넘었습니다. 하다보니 글 잘 쓴다는 말도 읽었습니다. 블로그에 쓸 데 없는 일기 쓴 성과는 좀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론에 고심하기도 하고, 수업에 대한 질문을 보면서는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었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입식 교육의 기수로서, 어느 수업이든 일단 받아먹고 보는 편이었습니다. 외우기만 주야장천 외우곤 하였습니다. 이야말로 '생각하기'를 남에게 대신 맡기는 행위였지요. 책을 읽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데에만 바쁘지, 저자와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건 제 능력 밖이었습니다. 토론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야 비로소 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능동적으로 펼쳐나가는 행위입니다. 설사 남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쓴다 할지라도, 쓰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언어로 내뱉어야 합니다. 하물며 토론 게시판에서 글을 쓰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이 우선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토론 게시판에서 얻는 것이 참 많습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이런 토론이활성화되면 좋을텐데, 나서보지도 않는 제가 소극적인 탓도 있겠지만 힘들 듯 싶습니다.

  제가 교수가 되면 전 제 강의에 토론 게시판을 넣겠습니다. 조모임은 없고! 중간/기말은 객관식:서술형 8:2로. 자는 사람은 깨우지 않고, 자리에 조용히 사탕을 두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이제 막 태어나고 있을 미래의 제자들이어 기억해주세요.


  심리학개론 수업도 재미있습니다. 우선 지난학기 마음의 탐구에서 배웠던 내용이 겹치니 쉽습니다. 강의 책이 따로 없고, ppt도 내용보다는 동기유발 중심이라 따로 필기를 하지 않으면 혼자 공부할 때 힘들긴 하겠지만, 필기는 또 좋아해서 교수님 말씀 적다보면 수업에 빠져듭니다. 교수님께서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모습도 많이 보이시구요. 심리학 수업만의 매력인 단체 실험(?)도 수업시간 간간히 진행됩니다. 휴강이 한 번 있어서 본격적인 수업이라야 한 번뿐이었지만, 한 학기동안 공부할 맛은 날 성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강의에 대한 평을 계속 쓰자니 앞에 공부에 대해 쓴 문단이 투정을 넘어 허세에 가까워 보이긴 합니다. 옙, 사실 너무 잠이 와서 못 듣겠는 강의 하나 외에는 제 시간표는 듣고 싶었던 걸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지부조화까지 계산에 넣으면 도저히 재미없을 수가 없는 시간표입니다. 다만 부담스러운 것은 복습! 이었습니다. 이게 오랜만에 공부좀 하겠다고 앉으니 잘 안되더라구요. 심리학 개론 수업을 들은 후 마음의 탐구나 심리학 개론 책을 보면서 기억에 대해 찾아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면서 기숙사에 돌아와 이렇게 블로그질이나 하고 있는 것 만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내친 김에 마탐 책을 잠시 뒤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억 왜곡'을 느낍니다. 아니 내가 이런 내용을 3개월 전에 정말 배웠단 말이야!)

  하루하루 배운 내용을 복습 하는 일은 생각보다 귀찮습니다. 일단 '기숙사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니' 무거운 교재를 들고 나가야 하는 것도 힘듭니다. 그나마 요즘은 학기 초반이라 휴강도 조금씩 있고 수업도 부담없이 가는 편이지만, 슬슬 학기가 진행되며 복습할 건 많아지고 시간은 없어질테지요. 어쩌겠습니까. 포스팅을 하며 느끼는 것은, 그래도 전 여전히 배우는 게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학문의 전당인 이 대학에서, 저보다 훨씬 공부에 의욕을 갖고 있는 학생들과 강의실에 함께 앉을 수있다는 것만으로 복에 넘치는 일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아무리 많이 해도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죄책감도 없구요. 


집은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기숙사는 이제 제 집입니다. 그러므로 기숙사는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