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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일기(2013~)

2013.3.15

  오랜만에 밤에 시간이 남는다. 룸메이트도 오늘은 늦나보다. 이번주는 시간이 부족해서 엄청 허덕였는데, 정작 시간이 남으니 할 일을 못 찾고 일기를 쓴다. 일기도 중요하다. 오늘 하루를 정리해보자.



1. 동소제


  

아무렴 부스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3월 13~14일 동아리 소개제 알쿨 부스

나는 부스를 새로 차릴 때/철거할 때 잠시 있었다. 

홍보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팜플렛 인쇄도 몇 번 더 했고, 신입 가입 신청서도 두툼하다.

내가 지키고 있던 오후쯤에도 새내기들이 와르르 몰려오더니 한꺼번에 가입 신청을 하고 갔다.

과연 몇 명이나 남아 진정한 알쿨러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13일에는 학관 앞에서 공연도 했다. 노래를 부르며 길을 다니는 보컬 친구도 불렀는데, 

학교 다닌지 3년이 되어서야 이 친구가 정말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 실험용 쥐


인문학 글쓰기 시간에 자기소개서를 쓰는 시간이 있어서 69동 감염실의 쥐의 입장에서 나를 소개했다. 

자기소개보다는 글 자체에 치중한 터라, 학우들의 '자기소개서의 취지에 맞지 않다'라는 질타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이 글에 만족한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나온 질문마저 쥐나 채식주의....따위였다. 어찌되었든 글쓴이인 나는 학우들의 질문에 (정작 하고싶었던 다른 이야기는 잊어버리고)'나는 동물을 사랑한다' 라고 강변했다.

 쉬는시간에 한 학우분이 '그렇게 동물을 사랑하면 수의과대학을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진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신경과학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더 어울릴 대답은 '오해입니다. 제 사랑은 '그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끼치지 말자'이지, 그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 정도로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아요.'였을테다.


  수업이 끝나고, 심리통계학 수업도 일찍 마쳐 쥐를 돌보러 69동에 올라갔다. 갑작스레 18동 주변에 있다는 실험동물 위령비가 보고싶어졌다. 가서 참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 때문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치운, 연구에 희생된 쥐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슬프지도 않았고, 격한 감정도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령비는 찾지 못했다.

  69동에 오니 문 앞에 검은 봉지가 여러 개 있었다. 아마 동물 사체가 담겨있겠지.


  현관에 지문을 찍고 들어가면, 우리 과방 옆에서 나는 냄새보다 훨씬 더 죽은 동물 냄새가 난다.


아무래도 아래 문단은 공개하면 안 될 것 같다.

  며칠 전, 직원분께 케이지에 쥐가 죽어있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었다. 그 전날까지 핏덩이었던 새끼쥐였다. 그분께서는 그냥 톱밥과 같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이니 어쩔 수 없었다. 정말 톱밥 무더기에 같이 섞어 버렸다. 어제는 아예 죽은 쥐 케이지만 따로 빠져있었다. 같은 식으로 톱밥째로 버렸다. 

  정말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식을 치르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69동 입구에 있는 동물 사체 처리서, 그것이라도 제대로 쓰고, 검은 비닐봉지에든 무엇이든 싸서, 실험에 희생된 생명이라고, 그렇게 표시하고 싶었다. 전날까지 살아있던 생명이었는데, 그것도 사람을 위해 살아준 목숨이었는데, 오줌에 젖은 톱밥과 쥐똥에 섞여 이렇게 '버려'도 되는지, 확신은커녕, 당연히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케이지 째로 주황색 봉투에 털었다. 일주일치 헌 톱밥을 담은 커다란 주황색 봉투를 화장실 옆에 두고 69동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오늘은 다들 멀쩡했고, 어제 케이지를 다 갈아준 덕에 치울 것도 딱히 없었다. 케이지를 꼼꼼히 확인하다보니 케이지 하나가 물통이 샜는지 어제 갈아준 톱밥이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그 쥐들만 새 케이지로 갈아주고 물통을 갈았다. 일을 끝내기에는 무언가 아쉬웠다. 먹이를 보충한다는 명분에 새끼쥐가 사는 우리를 열어 새끼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았다. 내가 덜렁거린다는 사실을 내 자기소개글의 댓글을 보고 깨달았으니(!) 나갈 때도 한 번 더 케이지들을 점검했다. 


  분명히, 나는 내가 다루는 생명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가 맡은 일의 의무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말로 동물을 사랑한다면, 감히 이런 일을 맡겠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신청할 수 있었을지도 잘 모르겠다. 무책임하지만, 그냥, 될 수 있으면, 동물들이 덜 힘들면 좋겠다.



3. I'm your Korean tutor, NOT you're my English tutor.


  2월엔 정말 돈이 없었다. 그놈이 토플이 뭐라고, 부모님께 용돈도 참 많이 뺏어갔다. 교환학생 갈 일까지 생각하니 막막했다. 학교 홈페이지든 스랍이든, 돈이 된다는 건 다 신청했다.(실험동물자원관리실 근로장학생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교양 피어 튜터링. 외국인이나 재외국민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리엔테이션 날에 가보니 '한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배정되어있었다. 서울대생에게 영어를 가르칠 자신은 도무지 들지 않아 바꾸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교육원측에서는 '한국어를 아무것도 몰라서 아직 튜터링 신청도 못한' 외국인을 배정해주었다.




  저도 이걸 원했습니다.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거든요. 


 안녕하세요와 ㄱㄴㄷㄹ은 알고 있을까요.


 어쩌면 English Speaking 수업이 되겠네요. 그나마 영어권 나라 사람인 게 어디야.




  다행히 메일을 주고받는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영어는 수업이나 시험용으로만 배워서, 제 글이 어색하거나 딱딱할지도 몰라염'이란 편지에에 얼굴을 모르는 외국인 교환학생은 'Your English is fantastic!' 이라는 감동적인 답장을 해주었다. 하지만 문자는 거의 받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도 답문이 오지 않았다. '내 메시지 못받았냐능ㅠㅜ'하고 문자를 보냈다. 바로 전화가 왔다!


  겨울에 영어공부 한 보람이 있었다. 듣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핸드폰이 가끔 메시지를 먹는다고 했다. 오늘은 동아리 활동때문에 바빠서 못 만나겠고 월요일은 어떻겠냐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다.

'E..Eh.. Let me check my schedule... Ah....'


Ah....


'네 전공을 알고싶다. 그래야.. 음.. 그.. 우리학교가 너무 넓어서..' 라는 말에 ('네 전공과 단대를 알아야 우리가 쉽게 만날 장소를 정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Student Center에서 만나잔다. '내 단대는 학관이랑 가까워서 난 좋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close가 생각이 안 났다. 단어가 기억 안 나서 영어가 잘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remind를 써야할지 remember을 써야할지 몰라 버벅였다. 사실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안난다.

  다행히 좋은 사람이었다. Your English is perfect라고 해주었다.

 


  그렇지요. 당신 한국어 실력에 비하면 내 영어는 퍼펙트하지요. 그런데 왜 당신 한국어 실력이 아니라 내 영어실력이 늘 것 같은지는 모르겠어요. 내 영어가 완벽하다면, 난 더이상 늘 것도 없어야 하잖아.


  어쨌든 월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한글 자모는 알고 한국에 들어왔는지 물어봐야지. 아, 그리고 튜터링 신청도.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가보다. 돈을 받고 영어 회화를 배우게 생겼다. 거 참... 최선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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