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흔한 Grafton Street의 버스커...는 아니고 UK 싱글 차트에도 몇 번 오른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오랜만에 한국어로 글을 씁니다. 어찌저찌해서 몇 년 전에 쓴 일기를 읽다 보니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표현하는데는 독백보다는 남에게 알리는 모양새가 읽기에도 쉽습니다. 의식의 흐름마냥 당장에 생각을 풀어내기도 필요하겠지만, 이 글을 읽을 누군가와, 훗날의 나라는 가장 중요한 독자를 위하여. 최대한 짜임새있게 일상을 써보겠습니다. 당연히 주제는 아일랜드 생활입니다. 제목은 후기이지만 내용은 일기라,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실 분들한테는 별 도움은 되지 않겠습니다ㅠ
일이 많아질수록 생각이 깊어질 겨를이 나지 않습니다. 고작 3주가 지났지만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는 저 자신이 사서 고생한 일도 많았습니다. 손발이 정신없이 뛰는 대신 머리는 단순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제 머리는 '어떻게 하면 영어를 더 쓸까' 라는 단순한 죄책감에 갖혀 있습니다. '그럼 영어를 배우러 갔지, 뭘 하러 갔냐' 라고 묻는다면, 음. 이곳에서 저는 '영어를 쓰는 일'만 빼면 다 잘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공부는 언제 할거냐는 초자아와 지금 아니면 언제 놀겠냐는 원초아의 대립. 손발이 원초아를 따라가니 초자아가 있을 곳은 머릿속 '단순한 죄책감'뿐이지요.
읽거나 듣는 수동적인 활동은 확실히 늘 법합니다. 제 바로 앞의 모니터 화면을 제외하면 주변은 죄다 영어입니다. 길거리 전단지부터 학교에서 오는 공지 메일까지 모두 영어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일단 영어로 된 읽기 자료를 읽어야 합니다. 다행히 제가 듣는 과목에는 크게 어려운 자료는 올라오지 않습니다. 어려운 단어도 몇 개씩 나오지만, 그래도 수능 단어 정도면 버틸만합니다. 듣는 데도 알게모르게 점점 알아듣기 쉬워지는 듯합니다. 처음 발 디딜 때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는데, 이제는 절반은 눈치로, 절반은 'Sorry?'로 살아갑니다.
제 영어 실력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듣기와 읽기에서 제일 중요한 조건은 대화나 글의 주제입니다. 읽기 자료가 쉽게 느껴지는 이유도 워낙 관심있는 주제이기 때문일테고, 똑같은 친구 입에서 나오는 말도 주제가 알만하면 머리에 영어 스위치가 켜진양 바로 들립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놈의 대뇌 번역기는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는 스위치가 바로 꺼집니다. 바로 옆에서 하는 대화도 제가 참여하지 않는 이상 들리지 않고, 몇번 가져와서 읽어볼까 고민한 학교 신문도 그 분량에 질려 아직까지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영어권 국가에서 얻을 가장 값진 배움은 말하기일 터입니다. 그리고 영어 말하기를 배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같이 사는 flatmate들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아일랜드는 철자와 단어만큼은 영국을 따라서, housemate라는 말 대신 flatmate라는 낱말을 씁니다.) 실제로도 플메 친구들과 가장 많이 대화합니다. 세 명 모두 모두 미국에서 온 덕에 Irish English보다는 듣기 편하고, 사람들 또한 착하고 친절해서 다시금 제 인복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따로 어떠한 표현이 맞는지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이 친구들은 저의 웬만한 broken English는 이제 그런갑다 하고 넘어갑니다. 덕분에 더듬더듬 얘기하고서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구글 번역기를 열어 원래 무슨 말을 해야 했는지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머릿속에 계획한 소통의 성과를 알아보는데는 이만한 친구들이 없으니, 결론은 저의 의식적인 노력입니다.
의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외국어로 말하는데 필요한 의식적 활동(?)은 관심과 호기심입니다. 상대방이나 말하는 주제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면 외국어로 된 대화는 절대 이어지지 않습니다. 당장 다른 여행자들과 만났을 때도, 관심 없던 나라에서 온 사람이면 Nice to meet you 하고 할 말이 없어지지만, 조금이라도 그 나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면 어찌하든 대화를 이어나갈만 합니다. 호기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라도 더 하려면, 마음을 열고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이외에도, '의식하는데' 도움 줄 영어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Academic Eng는 벌써 과제가 생겼고(사실 그 과제가 하기 싫어서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Academic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께 혹시 다른 영어 수업을 신청할 수 있는지 물어봐서 General Eng 수업도 신청했습니다. 늦게 신청한데다가 지난주에 골웨이 여행을 갔다와서 벌써 두 번 결석했지만, 다음주부터라도 제대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사족이지만 이 학교에서 가장 알아듣기 쉬운 수업이 Academic Eng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영어 수업 때 빼고는 절대 영어 듣기에 나오는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익히는 일도 일이지만, 10년 넘게 머릿속에 눌러넣은 영어를 활용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곳에서의 영어는 최소 여가, 최대 생존에 직결됩니다.
왜 초등학교 교과서에 Go straight and turn left가 나오는지 알겠습니다. 자기 소개보다도 길 묻는 말을 더 많이 썼습니다. 친절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리저리 길게도 알려주지만, 전부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알아들은 지점까지 간 다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니까요. 이 분들은 목적지가 보이는 지점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 동선이 같다면 바로 따라오라고 손짓합니다. 헤매고 있으면 무슨 문제 있냐고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재미있게도 여행자일 때와 학생일 때의 태도가 달라져서, 같은 영어인데도 활용 정도가 조금 달라집니다. 여행자로서 저는 '영어는 소통의 수단일 뿐'이라는 마음가짐때문인지 능숙하든 더듬대든 당당하게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학생으로 돌아오면 모두가 영어를 쓰는 집단 속에서 주눅이 들어, 'sorry?'한 번 하는데도 주저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6개월만 지나면 보지 않을 사람들. 저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는데다, 영어를 더듬는다고 무시할 사람이라면 말을 안 하면 더더욱 투명인간 취급을 할테니 무조건 일단은 나대야 할텐데,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쫄면 안되죠.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열심히 살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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