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오늘 힘겹게 갔다온 더블린 남부 택배 센터. 사진보다 훨씬 무지개가 잘 보였어요. 아일랜드는 하늘이 땅과 가까워서, 비가 흔한만큼 무지개도 자주 뜹니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친구들에게 익숙해진 후에나 쓰려 했습니다. 하지만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 내용이 술술 나오고, 뭐든 익숙해지고 나면 글감조차 안 될 만큼 사소해지는 법. 제목을 쓰고 나니 글에 속도가 붙습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인복 하나는 타고났습니다. 제 주변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만 붙습니다. 제 성격이 사람 따르고 자리 만들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또 모르는데, 하루종일 방 안에 가둬두어도 쉬운 장난감 몇 개만 있으면 시간갈 줄 모르는 사람이 또 저라서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가장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은 한국에서 온 같은 교환학생 친구입니다. 같이 듣는 수업도 많고, 하루 세 끼도 약속이 없다면 서로의 부엌으로 수저를 챙겨가서 같이 요리를 합니다. 교환학생 발표를 확인하던 당시는 합격자 문서 표의 내 이름 위 학번으로만 다가왔는데, 지금은 작은 행동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추 파악할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제 교환학생 생활의 본 목적은 여행이나 휴식이 아닌 영어였습니다. 그래서 저와는 목적이 다른 이 친구와 너무 가까워지면, 다시는 오지 않을 6개월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 걱정이 무색하지만도 않은 게, 확실히 같이 있을 때는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일부러 영어로 하다가도 몇 마디 안 되어 한국어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 교환 학생 생활의 목적이 영어였던들, '생활'이라는 전제를 지켜나가는데 이 친구는 제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 유명한 솔로몬 애쉬의 동조 실험. 모두가 오답을 택할 때 분위기에 휘말려 답을 알면서도 오답을 택하는 '보통 사람들'. 그 사람들이 당당히 정답을 고를 수 있게끔 만든 조건은 소박하게도 다른 답을 말하는 동료 한 사람이었죠(그 동료의 답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이요). 이 친구는 저에게 있어서는 그 동료와 같은 존재입니다. 낯선 곳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친구가 있다는 점은 선택에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하지만 지랄맞게 독립적인 성격인 저로서는 제 일상이 공유되는 정도가 도(?)를 넘는 순간마다 흠칫 당황합니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는 순간에는 원래 있어야 할 누군가의 허전함을 느낍니다. 아무도 모를 내적 갈등이지만, 그렇다고 이 친구에게 느끼는 고마움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이 친구가 없었다면 아일랜드 생활은 훨신 단조롭고, 무섭고, 외로운 날이 많았을 거예요.
그 다음으로 많이 보는 사람들은 역시 flatmates입니다. 앨리슨, 에이미, 아드리엔 모두 미국인이지만, 셋 다 다른 주에서 왔고, 성격도 제각각입니다.
보스턴에서 온 앨리슨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웃음을 터트려서 매번 영어 제대로 듣고 말겠다는 의욕에 불을 붙입니다. 아무리 평범한 일상도 시크하게 개그로 만드는 솜씨는 어디 토크쇼에 가도 지지 않겠지만, 제 별 것 아닌 말에도 바로 받아치는 실력 또한 장난이 아닙니다.
에이미는 일리노이의 전형적인(하지만 수영장은 없는) 미국 집에서 왔는데, 첫인상도 착해보였던 에이미는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저를 잘 배려해줍니다. 피닉스 파크의 동물원도 같이 갔고, 날씨만 괜찮다면 모레 글렌달록도 같이 갈 것 같아요. 제발 날씨가 일기예보대로만 가면 좋겠는데요...
아드리엔은 캘리포니아에서 왔지만, 아버지가 호주사람이라 거의 호주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호주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아보카도와 키위로 건강을 챙기면서, 베지마이트를 먹고난 제 감상을 동영상으로 녹화한다던지 뭔가 진짜배기 미국 플메들(?)이랑은 달라요. 사람이 야무져서 운동하기 좋아하면서도, 반대로 자주 아파서 걱정입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을 보게 되니 비로소 그들의 국적과 그에 얽힌 고정관념보다 사람들 자체를 볼 줄 알게 되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보지 못할 좋은 친구들과 살게 되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말이 좀 아쉽긴 한데, 다행히 정말 조금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동아리. club이나 society라고 부릅니다. 한국 학교의 동소제라고 할만한 refreshment day 때 저는 드로잉과 전통 음악, 게일어 동아리에 들었습니다. 이 중 게일어 동아리는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뒤로 제치더라도, 나머지 두 동아리는 한국에 비해 훨씬 동아리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편입니다. 다들 친목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굶주린 하이에나마냥 어떻게 영어를 쓸까 궁리하며 살아갔는데, 동아리 사람들을 만나며 그저 무언가를 하는 일에도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드로잉 동아리 Drawsoc은 매주 화요일 오후 두 시간동안 그림을 그립니다. 다른 주제, 다른 재료로 종이를 채우다 보면 두 시간 정말 금방 갑니다. 사람을 그리기 좋아하면서도 소심함에 항상 뒷모습만 몰래 그리던 저로서는 모델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작년 9월에 생긴 신생 동아리이지만 짜임새도 있고 사람들도 많아, 제가 떠난 후에도 번성할 건실한 동아리입니다.
지난 주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친구의 송별회가 있었습니다. 매번 그림만 그리던 사람들과 학교 바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끄러운 음악에 가슴이 철렁거리는 장소는 딱 질색이건만, 즐기려고 노력하니 또 괜찮더라구요. 동아리를 이끄는 친절한 아이리시 친구들과, 자기 나라 이야기면 끝도 없이 술술 나오는 다른 나라 친구들까지, 이야기를 듣는 순간순간이 재미있었습니다.
전통 음악 동아리 Tradsoc은 Refreshment day가 시작되기도 전에 찾아가서 가입한(?) 곳입니다. 수요일 저녁 학생회관에서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한참 구경하고, 이제는 악기를 가져가서 같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글 > 일기(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외에서 두 달, 언어장애 (0) | 2014.03.25 |
---|---|
23.02.2014 생활 후기 (0) | 2014.02.23 |
040214_아일랜드 생활 후기_영어에 대해서 (0) | 2014.02.05 |
2013. 12. 18 (0) | 2013.12.19 |
2013.12.16 (0) | 2013.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