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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견문

5.30 비상총회 후기

(뒤에서 라이트를 꺼달라고 하니까 바로 꺼주셨던 친절한 총학생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의식하는 순간은 많지 않습니다. '현재, 수십억 명이 살고 있는 시간을 그들과 함께 공유한다, 같은 공기로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망상이며 생각의 사치일 성싶습니다. 저도 역시 평범한 일상 속에 평범한 고민들을 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기말고사를 앞에 두고 공부를 피해다니며 작은 죄책감을 느끼는 게 전부인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만큼은, 저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시대를, 현재를 살았습니다. 2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향후 활동 계획을 위해 모였습니다.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서울대학교 법인화 설립준비위원회를 해체하라.' 이후 모인 학생들중 상당수가 직접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저는 본부에 깃발을 날리는 학생들을 뒤로 하고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저는 '서울대학교'를 검색했습니다.  과연, 연관 검색어에 '비상총회'가 따라왔습니다. 수십건의 뉴스가 스크롤바를 채웠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 15분도 안 되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오늘자 신문에 인쇄되었을 것입니다.
  총학생회가 학교 여러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이고, 길게 늘어선 셔틀 줄 옆에서 집회 참가자의 서명을 받기 위해 음료수 캔을 가득 들고 앉아있을 때도, 저는 비상총회 성사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인턴 사원들을 모집하는 포스터들 사이, 총학의 대자는 이전의 법인화 반대 대자보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서명을 하기 위해 셔틀 줄을 이탈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전에 예고했던 6시, 학생회관을 나오면서 올려다 본 아크로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습니다. 줄잡아서 5백명도 채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2천 명이 넘게 모였습니다. 정족 수 1700명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들이 아크로 그 낮은 계단에 줄을 맞춰 앉았습니다. 아크로가 그렇게 넓은 곳인지, 대학생활 3개월만에 알게 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 것입니다. 총학생회가 법인화 설준위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찬반 투표를 시행했습니다. 투표 후에는 앞으로 총학이 어떻게 움직어야 하는지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2,3안 중 하나에 집중할 것인지, 한꺼번에 다 실행에 옮겨야 하는지, 몇 번의 토론 끝에 1안, 본부 점거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중앙도서관과 본부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크로에서, 학생들은 바로 앞의 본부로 진격했습니다. 
   만감이 엇갈렸습니다. '바로 행동으로 돌입하다니, 서울대 학생들도 죽은 건 아니었구나' 에서부터 '운동권 총학은 무섭구나..' 까지. 비록 비상총회는 성사되었고, 총학은 학생들의 동의를 받아 행동에 들어갔지만, 이런 식의 집회를 처음 보는 저로서는 이게 과연 옳은 건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예고했던 6시부터 줄서서 거의 7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던 것은 그만한 인원이 모였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치겠습니다. 하지만 그 후 찬성 측의 청산유수 설준위 해체 발언과 정말 '사전에 총학이 반대 의견을 내어달라고 부탁한 것 같은' 반대 측의 의견, 찬성 측에서만 올라오는 수십장의 의견지, 각 단과 회장들이 안건지를 걷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실명 투표까지. '1 본부 점거, 2 국회 앞 촛불집회, 3 동맹 휴업'을 한꺼번에 하자는 과격한 수정안이 분위기에 휩쓸려 동의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애초에 총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비상총회에 올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달짝지근한 전체주의를 맛본 사람들이 저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법인화 반대에 대한 큰 이유 중 하나가 국회의 날치기 통과인데,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이 비상총회에서 더욱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절차에 따라 진행했더라면 총회가 더욱 빛났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꿋꿋하게 10시까지 아크로 계단을 지켰습니다. 그 곳에 모인 학생들이라면 아무리 번거로울지언정 비밀 투표로 진행했더라도 다들 따라주었을 것입니다. 설준위 해체라는 결과가 달라지지도 않았을텐데, 총학이 조바심을 낸 것도 아닐텐데 이 부분은 많이 아쉽습니다.
  총학과 본부를 점거한 학생 분들을 매도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분들은 총회라는 정당성을 등에 업고, 전체 학생들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가슴에 안은 채 어제 밤을 새우신, 우리 학생들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제가 그 분들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봤자 미안함과 감사함 뿐입니다. 만약 법인화가 백지화된다면, 그건 전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우리학교의 총학과, 투표를 실천으로 옮긴 본부의 학생들 덕분입니다. 이대로 우리 학교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가 될 지언정 학생도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이상, 이후 대학 측이 우리의 의견을 무시한 채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총장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어줄 때 까지, 서울대학교 학생 중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점거가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에 있다가 여기서 뉴스를 보니 '언론플레이'가 뭔지 실감이 납니다. 비상총회로 지지를 얻었다는 건 최대한 줄이고 '잘 돌아가던 법인화 진행에 일부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본부를 점거했다'는 식이네요. 비상총회 연다고 거의 2주는 홍보한 것 같은데 기습이라... 기자분들이 동문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

7시 50분 경


8시 30분 경


에이, 설마요.. 그냥 한 시간만에 사람들이 비상총회에 흥미를 잃어서 검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