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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스포 없이 영업하기 테드 창의 소설집 에는 무동무언증이 나온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깨달은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말하기를 그만두는 병이다. 시리즈를 읽은 독자는 잠시 무동무언증에 빠진다. 작품이 뛰어나 말을 잇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가 인류의 운명을 눈 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문명은 이다. Remembrance of Earth's Past Trilogy 는 인류와 우주 간의 이야기이다. 시간 배경은 서기를 넘고 공간 배경은 우주를 채운다. 이렇게 커다란 무대에 이야기를 꽉 채우는 작품은 적다. 몇 권 안 되는 소설에 긴 세월을 견디는 인물들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 시대를 지나며 발전할 사회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울할 때 보면 좋은 한국어판 이전 표지 불로장생하는 주인공이 나온 작품은 많았..
비인간과 마주하는 하루하루 과학철학자 홍성욱은 저서 에서 과학기술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소개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nonhuman) 사이의 네트워크이며 실험실에서 하는 활동은 인간이 비인간을 길들이는 행위이다. 실험실에서 발견한 숱한 비인간, 항체나 줄기세포 따위 중 바로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쓰인 것은 없다. 인간에게 이로운 조건을 찾고, 재현이 되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비인간은 인간을 이롭게 한다. 다르게 말하면 실험실은 길들여지지 않는 비인간을 마주하는 곳이다. 야생 개가 사람을 문다면, 길들여지지 않은 비인간은 사람을 좌절시킨다. 실험실의 비인간이란 내가 실수하기를 바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디서 나를 함정에 빠트릴..
과학 글에서 용어를 쓰는 방법 연습삼아 읽은 논문을 짧은 기사로 요약하는 연습을 했다. 과학동아 이번 호의 새로운 연구를 소개하는 페이지를 참고했다. 딱딱한 영어를 그보다는 부드러운 한국어로 옮기는 일도 어려웠지만 가장 힘든 관문은 문장마다 나오는 전문 용어였다(그런 점에서 과학동아 기사는 친절하면서도 전문성이 살아있었다). 업계에는 업계 사람들만 쓰는 말이 있다. 과학계는 그중 제일 깊고 좁은 업계이다.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연구자들끼리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나올 용어가 남들이 듣기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연구를 소개하기 전에 용어가 무엇인지부터 한 문단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고유명사는 소리대로 쓰면 된다. 생물학에서는 온갖 유전자와 단백질에 이름이 있다. 과학자는 정성을 들여 자신이 발견한 물질에 이름을 붙인다. 애기장대..
기사 쓰기 연습: Donato et al., Nature 2013 학습 능력을 조절하는 신경 세포 기전 밝혀내 학습 능력을 조절하는 파발부민 바구니 신경 세포(인터뉴런)의 기전이 밝혀졌다. 스위스 프리드리히 마이스너 기관 피코 카로니 연구진은 파발부민 바구니 신경 세포의 활동이 학습 상태를 조절한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12월 자에 발표했다. 파발부민 바구니 인터뉴런은 흥분성 신경 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억제성 사이 신경세포(인터뉴런)이다. 인터뉴런은 뇌의 80%인 흥분성 신경 세포의 활동을 조절한다. 연구진은 설치류를 풍요로운 환경에 두어 학습이 잘 일어나도록 하거나 공포 조건화로 학습 능력을 떨어뜨리고 바구니 뉴런의 파발부민 단백질 발현 정도와 학습 능력을 비교했다. 설치류가 새로운 학습을 잘 배우는 환경에서는 바구니 뉴런의 파발부민 발현량이 적은데 비해 경직되어 ..
안구건조증 안구건조증이 있다는 사실을 시력교정 검사를 하고서야 알아냈다. 눈에 마취제를 바르고 종이를 끼워 눈물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를 아는 검사를 했다. 나는 보통 사람들 눈의 절반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눈을 써왔는데도 왜 나는 내가 안구건조증인지도 모르고 살았을까? 안구건조증이 없던적이 없었기에 비교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렌즈도 안 끼고 수술도 안 한 맨눈이 설마 안구건조증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안구건조를 느낄 때가 있었다. 렌즈를 낄 때는 얼마 되지도 않아 눈이 말랐다. 그럴 때면 인공 눈물을 눈에 뿌렸다. 바닷물을 삼키듯 인공눈물을 넣을 때만 시원하고 좋았지 뚜껑을 닫자마자 다시 건조해졌다. 너무 많이 치다 보니 속눈썹에 소금이 엉켜 인공 눈곱이 꼈다..
최신 논문에서 본 변칙 현상: 편도체 뉴런의 일탈 지난 6월 저널 클럽을 준비하기 위해 논문을 읽으며 학부생 때 배운 변칙 현상을 보았다. 변칙 현상(anomaly)이란, 쿤이 에서 쓴 용어로, 패러다임에 따라 실험하고 결과를 예측하였으나, 정작 자연은 다른 결과를 보이는 상황을 말한다. 저널 클럽이란 학생이 한 논문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자리이다. 내가 찾은 논문은 요약하자면 쥐가 행동하는 양상에 따라 쥐의 편도체 뉴런이 다르게 활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4월에 발표되었다. 얼핏 보면 변칙 현상이랄 것까지 있겠나 싶겠으나, 연구자가 예상하던 바와 실제 결과가 다르게 나온 논문이다. 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서 달리 활동할 뉴런이 뇌 어딘가에는 있을 터이다. 하지만 편도체 뉴런은 다른 일을 하리라 예측되어왔다.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에 관여한다고 알려..
신경과학으로 철학하기 포스팅을 시작하며 블로그에 '신경과학으로 철학하기' 라는 포스팅을 하면 재미있겠다. 포스팅을 하기 위해 논문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뼈저리게 느끼듯, 글 한 편을 완성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창의성이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것이라 스티브 잡스가 그랬으니, 그 말을 빌려 가장 초보적인 창의력 연습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집에 있는 과학 철학 책을 천천히 읽으며 지금 내 주변에 이를 적용할 요소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나는 과학으로도 인문학으로도 역량이 부족하다. 대학원 전공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지는 이제 1년째고, 글 쓰는 일을 각 잡고 해본 적은 없다. 참신하고 치밀한 글은커녕, 누군가 콧웃음을 치고 반박 댓글을 달아도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매일 하던 ..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며 대학생 시절, 나의 꿈은 내가 이룬 연구가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기억할 만한 사실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의 전공도 듣고 책도 읽고 혼자 학회도 갔다. 블로그에 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 나는 김연수의 에 나오는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라는 구절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매일 할 수 있는 일. 가령 한 학기 수업에 쓰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고 할 때나 그 문장을 곱씹었지, 매일 하지 못하는 일을 꿈꾸었을 때는 그 문장을 떠올리지 못했다. 우주는 내가 매일 교과서의 한 챕터를 읽어나갈 때에는 나를 도왔지만, 교과서에 실릴만큼 대단한 연구를 하는 일에는 도와주지 않았다. 무심한 우주를 내 편으로 만들..